욕하면서 본다는 막장 드라마처럼 최 회장의 불륜은 일상의 일, 기정사실이 된 듯하다. 최 회장 부부의 이혼도 최 회장의 뜻대로 “시간을 가지고 대화로 풀” 문제로 어영부영 굳어졌다. 불륜 공개 직후 한때 에스케이 계열사의 주가가 급락했지만, 4조원대라는 최 회장의 주식 지분이나 그룹 내 위상은 요지부동이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지휘하다 돌연 터진 혼외자 파문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지금껏 은둔하고 있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는 처지가 판이하다. 장기간의 외도와 혼외자를 뒀다는 점에선 같은데 뭐가 달라서일까. 솔직하게 털어놓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월급 받는 처지라면 아무리 권력 엘리트라도 세세연년 제왕적 권력을 누리는 재벌과는 애초 비교가 불가능할 터이다. 지금 누가 그를 부도덕하다고 내쫓을 수 있겠는가.
제왕(帝王)은 무치(無恥), 즉 임금은 부끄러울 게 없다는 말이 있다. 당 현종이 22살의 며느리를 취해 양귀비로 삼을 때 핑계가 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최 회장도 이번 일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하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종교적 신념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아 후련하다는 분위기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은 쉽게 흐려진다.
하지만 ‘제왕무치’는 문란한 이성관계를 정당화하거나 아무 짓이나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제왕은 뭐든 할 수 있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그러자면 항상 최선의 결정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 우선이다. 조선의 왕이 일상의 언행 하나하나가 다 기록되는 것은 물론, 용변 보는 일이나 잠자리조차 여러 사람의 감시 아래 치러야 했던 것을 두고도 제왕무치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한 것은 왕이 부끄러움이나 비밀 혹은 사적인 무엇과는 무관한, 전적으로 공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공(公)의 화신인 임금은 스스로 언행을 삼가고 모든 일에 사사로움이 없어야 했다.
그런 군주제의 기준에 비춰도 최 회장은 ‘무치’할 게 없다. 출장길에 몰래 저지르던 외도가 ‘한남동 사모님’으로 반쯤 공공연한 일이 되는 동안 회사나 관련 회사의 돈으로 몰래 그 외도의 비용을 댔다면 공적 자원을 사사롭게 쓴 것이 된다. 최 회장은 이전에도 거액의 회삿돈을 빼돌려 대형 도박에 가까운 모험적 개인투자에 쓰는 바람에 실형을 받았다. 최 회장 쪽은 펄쩍 뛰지만 그때도 외부인에게 휘둘리더니 이번엔 내연녀다. 기업 안에서 제왕적 권력만 누릴 뿐 부끄러움 없이 행동해야 할 공인의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가 국민경제에 심대한 비중을 지닌 재계 서열 3위의 재벌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군주제의 시대도 아니다. 재벌 회장이라고 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일 순 없다. 최 회장의 고백이 어떤 식으로 귀결되느냐에 따라 부도덕이 용인되는 잘못된 신호가 될 위험도 있다. 지금은 개인의 행복추구권보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힘 있는 자의 일탈이 더 문제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여현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