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운명? 숙명?

이윤진이카루스 2011. 5. 3. 10:04

인간에게 운명이나 숙명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만이 자신의 운명이나 숙명을 글이나 그림, 또는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운명이란 인간만의 것이리라. 나는 운명을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가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생애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여 인간이 죽지 않거나 아주 길게 장수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에게 운명은 없어지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죽지 않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지니고 살 필요가 없으리라. 부자가 되거나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아도 영원히 살 수 있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며, 나아가 작위적 행위가 필수적이겠는가. 그리하여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과 진배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왔다. 하늘을 날기 위하여 인간은 목숨을 버리기조차 마다하지 않았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하여 지금도 사람들은 죽어간다. 심해를 탐사하기 위하여 특수한 선박을 건조하거나 우주를 탐험하기 위하여 로켓을 쏘아 올리는 행위는 예전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아마도 인간은 불가능한 죽음에 도전하여 죽으려 하지 않을까. 따라서 삶과 생명은 죽음을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과 생명이 죽음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해야 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장엄한 순간의 죽음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에 가장 큰 일이 죽음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이 가장 비장하고 중요한 시간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의 죽음이 살아남는 자들에게는 그 인간에 대한 망각이 시작되는 시점이라면 우리는 망각되어 가는 인간에게 결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 이유인즉 아무도 죽음이후의 세상에 다녀온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인간의 죽음은 생명이 없어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동물과 식물 모두 죽음이후는 아무 활동도 없는 정적의 기간으로 망각되어가지 않던가? 소수의 사람들이 사후의 세상을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주장에 대한 증거를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후를 논할 자격도 없고 논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삶은 어떠한가? 혹자는 삶의 일부가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살다가 보면 죽음이 따르는 것이지 인간은 죽음을 위하여 살 필요도 없고 실제로 죽음을 위하여 살지도 않는다는 논증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다시 말해서 죽음이 삶에 포함된다는 주장에는 강력하고 올바르게 살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말아서 죽음조차도 초월하라는 계시가 들어있다. 물론 이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역사에서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던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위시하여 토마스 모어 등등 적지 않은 숫자의 유명 인사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공동의 선(善)이나 자신만의 신념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도 죽음을 위하여 투쟁하거나 항거한 것은 아니었다. 환언하여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려고 했을 뿐 죽기 위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비장하고도 장엄한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과연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자신의 산화(散華)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멸망을 어떻게 수용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그들은 죽음의 문전에 이르러서도 한 오라기의 실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강의 회복을 소망하거나 결정된 자신의 죽음이 철회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의 소망이 절망으로 끝난다면 허무한 결과를 얻을 뿐이고 우리는 그 결과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다.

여기서 철학자 두 명의 사상을 통하여 죽음을 바라보자. 먼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헤라클리투스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회가 급격히 민주화가 되면서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그는 모두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곧잘 사색에 잠기게 되고 그리하여 변하는 세상을 일반화하여 이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생긴다. 헤라클리투스는 사회가 변하여 자신은 귀족의 지위에서 몰락하자 변화라는 문제에 천착했던 듯하다. 그는 곧 대립되는 것이 하나라는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그것들은 모두 동일하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있는 자들과

잠들어 있는 자들, 젊은 것과 늙은 것. 왜냐하면 이것이 저것들로

변하고 저것들이 이것들로 변하기 때문이다.’ ‘찬 것은

따뜻해지고, 따뜻한 것은 차게 된다; 축축한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축축해진다.’

‘They all are the same, the living and the dead, those who are

awake and asleep, young and old. For these turn into those and

those into these.' ‘The cold becomes warm, the warm

cold;

the moist dry, the parched wet.'

 

그리하여 헤라클리투스는 자신의 논증을 확대하여 다른 역설을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신(神)은 낮과 밤, 겨울과 여름, 전쟁과 평화, 포만과 배고픔이다.’

‘전체와 비-전체, 동질성과 이질성, 통일성과 이원성이

연결되어, 모든 것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모든 것이 된다.’

‘우리는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하나이자 같다.’ ‘선과 악은

동일하다.’

'God is day and night, winter summer, war peace, satiety

hunger.' 'Connected are wholes and non-wholes,

homogeneity and heterogeneity, unity and duality, all becomes

one and one becomes all.' 'We are and we are not.'

'The way up and down is one and the same.'

'Good and evil are the same.'

 

죽음에 대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다른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이다. 그는 시간은 망상이며, 시간과 함께 변화와 죽음의 세상도 망상이며 참된 실제의 세상은 시간이 없고 죽음도 없는 정신적 통합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이 두 철학자들 통하여 죽음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노력을 볼 수 있다; 물론 헤라클리투스나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각자가 수용하든 아니면 거부하든 그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가 이 두 사람의 철학자를 능가하여 더 설득력이 있는 논증을 발표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리라.

이제 나는 영화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예시하고 싶은 영화는 미국 영화 대부(代父: Godfather)이다. 먼저 독자 여러분은 이 영화는 거의 거짓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야말로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주지하시라. 영화 대부(代父: Godfather)는 미국 작가에 의하여 소설로 만들어져 실제 미국의 마피아의 동의(?)를 받고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미국의 잔혹한 마피아 세계를 그린 영화다. 그러나 마피아 조직을 추적하여 주요 마피아 두목을 감옥에 보냈던 미국 수사관의 말을 들어보면 실제로 마피아 두목들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심지어 좀스러울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 대부(代父: Godfather)에서 주인공들이 벌이는 가족을 위하여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는 논리는 픽션(Fiction)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영화에서 열연하는 주연급 배우들의 명성에 걸맞은 연기는 청소년에 비현실적인 영웅심을 심어주기에 정말로 합당하다. 영국에서 대학을 다닌 나의 지인은 많은 대학생들이 그 영화에서 배우들이 읊조리는 대사를 기억하고 화제를 삼는다고 하니 영화 대부(代父: Godfather)의 인기는 아마도 장구한 세월동안 계속될 것 같다. 내 자신도 그 영화를 아마도 비디오로 구입하여 여러 차례 관람하였으니 무엇이 그 영화의 매력일까?

이탈리아의 시실리 섬에서 억울하게 부모와 형을 마피아에게 잃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도착하는 병약한 소년이 미국의 이탈리아 이민자들 속에서 커가면서 결국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괴롭히던 마피아 두목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나중에는 시실리 섬으로 돌아가 부모와 형의 복수까지 하는 영화 대부(代父: Godfather)의 이야기는 범죄자들의 음모와 그 음모에 대응하는 또 다른 범죄자들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처럼 검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마피아 두목의 아들은 결심하지만 아버지가 총알 세례를 받고 아버지의 뒤를 이을 형이 난사를 당하여 숨지자 어쩔 수 없이 복수극에 뛰어들어 마피아의 두목이 된다.

이 영화에서 내가 느끼는 요점은 인간의 취약성에 관한 것이다. 위협을 당하여 죽음이 다가오면, 자신의 능력이 과소평가를 받게 되면, 많은 돈을 벌려면, 많은 사업체를 거느려서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면 기꺼이 사람은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데 심지어 형제간에도 배신이 일어난다. 이런 배신을 이 영화는 매우 사실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마피아 조직이 자신들을 family라고 부르듯이 이들 조직은 가족을 토대로 범죄를 조직하여 가족의 유대가 깨지면 형제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만큼 혈육의 정이란 이성보다는 감정적이기 때문에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일은 순식간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사고를 중시하는 이성에 비하여 감정인 사랑은 맹목적이라는 이유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아야 하는 가족끼리 순식간에 증오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을 우리 집안이나 주변에서 흔하지 않은가? 또 다른 서양영화 가시나무새(Thornbird)는 호주대륙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이야기와 가톨릭 사제로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구하는 사람과 그 사제를 어린 시절부터 연모하여 사랑하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영화에서 한 가족구성원은 “증오는 상대편이 쓰러져서 더 이상 증오를 할 수 없으면 매질이 끝난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이 쓰러져도 주먹질은 끝나지 않는다”고 절규한다. 이렇게 되면 물보다 피가 진한 것이 아니라 물보다 피가 더 독한 것이 된다. 가족 간에도 이렇게 증오가 쉽게 폭발하고 깊을 수 있는데 하물며 타인들 사이에서는 더 하지 않겠는가? 집을 나와서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귀가할 때까지 우리는 타인과 만나고 대화하고 어울린다. 더구나 나도 타인도 모두 죽음이나 운명 앞에 취약한 인간일 따름이기에 배신과 증오는 - 물론 관용과 용서도 있다 - 다반사이다.

위협에 굴복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큰 재산을 바라고, 권력을 탐하기 때문에 인간이 취약하다면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그런 인간을 어리석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취약하거나 허약하다는 말은 약점이 많다는 뜻이고 약점이 많다는 의미는 현명하지 못한 것이니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욕망,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 재산과 권력에 대한 욕망... 이 어리석음의 근저에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이런 욕망은 영원히, 부유하게, 명령을 내리면서 살고 싶은 인간, 아니 동물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동물은 충분히 먹고 다른 동물을 지배하면서 영원히 살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이 동물이란 말인가, 인간은 동물과 동일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동물과 달리 인간이 역사 이래 이룩한 소위 문명이란 무엇일까. 문자와 회화와 음악과 건축물과 제도 따위가 무엇일까. 이런 것들이 동물적인 감정의 소산이 아니라면 분명히 이성(理性)의 소산일 텐데, 그렇다면 이성이란 사고력을 의미하는 바, 인간의 문명이란 이성 즉, 사고력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음악과 관련하여 전개하겠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인 운명을 생각한다. 내가 지적하는 악곡의 이름은 피에트로 마스카니 (Pietro Mascagni)가 작곡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 중에서 간주곡(Intermezzo)이다. 음악을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은 그림에서 마찬가지로 어렵다. 아마도 이 어려움은 소위 예술작품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고 우리는 톨스토이(Tolstoi)처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톨스토이는 예술론에서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진(眞)은 진실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과 일치시키고, 선한 행위를 권하여 선(善)을 도덕과 동일시하며,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를 미(美)로 표현하여 예술행위와 동등하게 논증하는데 러시아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부유하게 생활했던 탓인지 톨스토이는 미(美)를 추구하는 생애를 매우 타락하고 비인간적으로 기술한다. 다시 말해서 미(美)를 추구하는 삶이라 부도덕하여 선(善)이나 진실을 추구하는 삶과 비교하여 매우 천박하게 톨스토이는 취급한다. 따라서 소위 미(美)를 경쟁하는 대회란 아주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고 우리는 미인(美人) 선발대회 의미에 당연히 의아심을 품게 된다. 인류 역사상 자신의 신념 때문에, 그리고 어떤 이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글이라고 칭송하는 자신의 죄(?)를 옹호하는 말인 변명(辨明: Apologia)을 제자인 플라톤의 통하여 세상에 남기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매우 못생긴 사람이었단다. 도대체 아름다음의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현대적 의미에서 왕자병이나 공주병 환자에 지나지 않는, 정신적으로 가장 추한 사람을 미인대회는 선발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남자는 미인대회의 대상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위 잘 생겼다는 남자들이, 아니, 조금 생겼다는 남자들이 성형수술을 해가며 연예계 몰려드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결코 꽃과 같아서 꽃미남이라는 소리를 듣는 배우가 아닌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 대부 이야기로 돌아가자. 알 파치노는 가톨릭 사제에게 심지어 자신의 형까지 살해한 죄악을 고백한 후 늙어서 마피아 두목의 자리를 내놓고 아마도 이탈리아의 시실리로 보이는 마을에서 생을 마친다.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알 파치노의 머리에는 자신이 지나왔던 삶의 고비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회상과 함께 영화에 삽입되어 흐르는 음악이 바로 마스카니의 간주곡으로 알 파치노의 죽음을 운명으로 승화해간다. 어쩔 수 없이 한계를 지니고 따라서 오류투성이의 삶이지만 그래도 진한 감동을, 그 비감한 음악과 함께, 우리에게 전하는 영화 대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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