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정치권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청와대와 국회, 여당과 야당이 맞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청와대와 새누리당, 새누리당 안에서도 친박 대 비박 등이 어지러이 얽히고설키며 심각한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가뜩이나 심각한 경제난과 민생고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정치권의 안정이 필요한 시점인데도 상황은 전혀 반대로 흐르고 있다. 당장 정치권은 거의 올스톱된 상태다. 나라의 안정에 누구보다 노심초사해야 할 대통령이 앞장서 갈등의 핵폭탄을 터뜨린 결과다.
삼권분립 위배와 무관한 거부권 행사
개정된 국회법이 위헌이나 삼권분립 위배와 무관하다는 점을 더 이상 누누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법의 위임 범위를 벗어나는 시행령, 법의 취지를 왜곡하는 ‘법 위의 시행령’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개정된 국회법은 청와대의 트집을 차단하기 위해 정의화 국회의장까지 나서서 법안의 문구를 고쳐 여야 합의로 정부에 송부한 것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굳이 거부권 행사를 들고 나온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번 기회에 여당을 장악하고, 국회를 길들이고, 자신의 건재를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메르스 사태로 실추된 권위를 되찾고, 국민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국면전환 효과까지 덤으로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정치권의 안정과 평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날 국무회의 발언을 보면 오만과 독선, 견강부회가 치유불능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으로 행정업무를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정부의 마비, 국가의 위기가 국회법 개정 문제 때문에 온 것인가. 정부의 총체적 능력 부족과 계속된 시행착오, 판단 잘못에 대한 자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무엇보다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부터 염치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본인을 제외한 정치인들을 모두 ‘형편없는 사람들’로 몰아쳤다. 심지어 국회법 개정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국회의장에게까지 박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망신과 모욕을 안겨주었다. 입법부 수장마저도 손아랫사람으로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 찍어내기 의도
박 대통령의 발언 중 “당선된 뒤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 운운한 대목에 이르면 더욱 말문이 막힌다. 과연 박 대통령이 지금 ‘배신’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는가. 경제민주화며 복지며 대선 과정에서 남발했던 박 대통령의 공약은 모두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대통령의 책무를 게을리함으로써 국민에게 최대의 배신감을 안겨준 사람이 바로 박 대통령이다. ‘당선 뒤 배신’이야말로 박 대통령을 설명하는 열쇳말이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파국’을 담보로 한 일종의 ‘협박 정치’라고도 할 수 있다. 재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돼 의결될 경우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치명상을 입게 되며, 대통령이 새누리당을 탈당하는 사태까지 올 수 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파국을 맞고 싶으면 재의를 한번 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누리당 의원들이 결코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리라는 계산을 마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치적 셈법에서는 참으로 빠른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의 비난의 화살이 겉으로는 정치권 전체를 향하고 있지만 핵심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한 것이라는 것도 정치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이날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의 날 선 발언을 통해 유 원내대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유 원내대표는 국회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균형발전을 추구해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다”는 등의 발언으로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가 하면, ‘국회 중심의 정치’를 앞세워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런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여당 지도부는 언제나 자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부하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거부권 행사에 담긴 메시지다.
지금의 정치권 역학상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앞날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올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에는 대통령한테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이 참으로 많다.
[사설] 정국을 파국으로 모는 대통령의 협박정치
등록 :2015-06-25 18:50수정 :2015-06-25 19:43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의 칼을 빼어 들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임무에서는 한없이 굼뜨고 우유부단하더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문제에서는 참으로 신속하고 강력하기만 하다. 박 대통령이 이날 국무회의 발언에서 쏟아낸 정치권에 대한 비판과 혐오는 섬뜩할 정도다. 여야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는 목소리가 청와대 본관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고 한다. 국민은 ‘메르스 대란’을 촉발한 이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대통령이 미안해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대통령이 화를 내고 삿대질하는 모습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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