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21세기 고전](34)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24. 23:41

[21세기 고전](34)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이한음 과학책 번역·저술가

ㆍ정신분석+분자생물학, 뇌를 밝히다

[21세기 고전](34)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즉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제약 때문에 차마 손을 대기가 꺼려지는 영역이 과학계에는 많이 있다. 얼마 전까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흑물질과 암흑 에너지도 그쪽에 속했다. 지금도 거의 그렇다고 말할 수 있긴 하다. 용감하게 뛰어들었다가 오랜 세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밑 빠진 독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꼴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는 영역이다.

[21세기 고전](34)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프로이트에게는 정신과 의식이라는 문제가 그러했다. 전망이 안 보이자, 그는 조금만 더 했다면 노벨상을 안겨주었을 수도 있는 신경세포 실험 연구를 포기하고 상상의 세계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계에는 어떤 고민이든 해석해줄 꿈의 세계로 받아들여지고, 과학계에는 검증 불가능한 몽상의 세계로 여겨지는 가상 세계를 구축했다. 옳든 그르든 간에, 그 방법으로 프로이트는 밑 빠진 독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정신분석이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해 빌빌거리자, 그 주제는 다시금 철학도 과학도 꺼리는 것이 되었다. 캔델은 그 어정쩡한 시기에 그 문제에 달려든 소수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본래 그는 정신의학계의 주류였던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었지만 난무하는 근거 없는 추측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드, 자아, 초자아 같은 것이 뇌의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겠다는 생각도 품었고, 학습과 기억의 생물학적 토대를 발견한다면 의식 같은 고등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윽고 직접 실험에 나섰다.

더 나아가 그는 분자생물학이라는 당시의 신생 학문이 정신의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세포와 생명 분자 수준에서 벌어지는 활동, 즉 뇌에서 벌어지는 생화학적 과정들로 마음과 의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단순한 신경계를 지닌 갯민숭달팽이의 일종인 군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서, 정신의학과 분자생물학을 접목시키려 시도했다. 그리고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밝혀낸 공로로 2000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인 동시에, 정신의학과 분자생물학이 어떻게 엮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사이기도 하다.

당시 의사이면서 생물학 연구를 하겠다고 나선 그는 별종 취급을 받기도 했다. 정신과 의식을 생물학적으로 연구하겠다고, 즉 그것들을 뇌세포의 활동으로 설명하겠다고 나선 이는 더욱 더 드물었다. 게다가 서로 멀기만 한 정신분석과 분자생물학의 접목까지 내다보는 그의 관점은 독특하기 그지없었다.

그 험난한 길로 뛰어든 자신의 인생을 담은 이 책은 다른 책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색다른 시각에서 사상과 관점의 변화, 학문 융합의 역사를 보여준다. 현재 뇌과학과 분자생물학은 가장 첨단을 달리는 동시에 가장 인기 있는 분야가 되어 있다. 하지만 수십년 전만 해도 그 둘을 통해 마음, 정신,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같잖게 여기던 이들이 학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 짧은 기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많은 연구자들이 그 변화에 기여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던 캔델은 그런 변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를 개인사와 엮어서 흥미롭게 들려준다.

구체적으로 그는 군소를 대상으로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금방 잊히는 단기기억이 오래 존속하는 장기기억으로 어떻게 전환되는지를 연구했다. 그러면서 기억상실증 같은 정신질환도 모두 뇌세포의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정신과 뇌가 분리불가능하다는 이 원리는 지금은 상식이 되어 있지만, 그 깨달음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이처럼 상세히 보여주는 책은 드물다.

이 책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 또 다른 요소는 과학뿐 아니라, 철학과 예술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깊이 있는 식견이다(이 점은 캔델의 다른 책 <통찰의 시대>에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곳곳에서 여러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인용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또 저자는 자기 가족을 쫓아내긴 했지만 20세기 초에 유럽의 문학, 미술,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빈에 애증의 감정을 지닌다. 그래서 빈 문화의 한 축을 이루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도 비슷한 양가감정을 갖는 듯하다.

저자는 정신분석이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뇌과학 같은 분야의 새로운 연구 성과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할 방안을 찾으려 애쓴다. 이 독특한 태도 덕분에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각과 고뇌의 역사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읽고 나면, 저자의 시도가 과연 훗날 성공했다고 받아들여질지 추측해보고 싶은 마음이 여운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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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401&artid=201609231926015#csidxf4ce613d48bbba3a5aec79b29b5256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