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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탓이 아니라, 성장환경이 바꿔놨어요

이윤진이카루스 2013. 9. 1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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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탓이 아니라, 성장환경이 바꿔놨어요

등록 : 2013.09.10 19:26 수정 : 2013.09.10 19:26

‘생김새 달라도 우린 똑같은 유전형’. 일란성 쌍둥이처럼 유전자가 똑같은 물벼룩들이 사는 환경이 달라지면 거기에 적응하며 모습까지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그라왈, 사이언스(2001)

[사이언스 온] 쌍둥이 물벼룩 생김새가 다른 까닭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며 각지에서 갖가지 동물들을 만나지만 그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유연한 생활 전략이다. 주어진 환경에 맞춰 생긴 모습이나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유연함을 관찰하면서 ‘유전자=형질’의 공식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유전자가 그저 주어진 염기서열 정보대로 생명체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여기 두마리의 물벼룩 사진을 보자. 2001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에 실린 것이다. 한마리는 평범하게 생겼고, 다른 한마리는 긴 꼬리에 머리에는 뿔까지 달렸다. 다른 종의 물벼룩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두마리는 같은 종인데다 나이까지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눈치 빠른 독자는 그야 유전형이 다르니까 그렇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같은 종의 생물이더라도 개체 간에 생긴 모습이 다양한 가장 큰 이유는 각 개체가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제각각 유전 정보를 이용해 기능적 형질을 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마리의 물벼룩이 똑같은 유전형을 지닌다면 어떨까? 사진에 보이는 두마리의 물벼룩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유전자가 동일한 ‘클론’이다.

사진의 물벼룩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은 유전자 차이 탓이 아니라 성장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두마리의 클론을 두개의 동일한 수조에 나누어 키우되, 한 수조에만 포식자 물고기의 화학성분을 넣어주어 마치 잡아먹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 결과 물고기의 화학성분이 있는 환경에서 자란 물벼룩은 자신을 포식의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뾰족한 투구를 쓰고 꼬리의 날을 세우게 되었다.

쌍둥이인 다른 물벼룩도 물론 유전적으로는 이런 형질을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염기서열 유전 정보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장하는 동안에 이런 유전자를 발현하게 하는 환경의 자극이 없었던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와이텀 숲 사는 박새는 기후 변화로 새끼들의 먹잇감인 애벌레가 점점 이른 봄에 출현하자 유전형 변화 없이 생활 전략을 바꿔 번식 시기를 앞당겼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화학성분 수조서 자란 물벼룩
위험 지키려 투구 쓰고 날 세워
유전자 같아도 환경변화 따라
몸도 번식 시기도 달라져
쉽게 바뀌는 환경·기후 맞춰
표현형은 바꾸되 유전정보는 간직
이런 유연한 생활 전략이
새로움에 적응하는 다양성의 밑천

이처럼 똑같은 유전자를 지닌 생물체라 하더라도 환경 조건에 따라서 유전자의 발현을 달리하는 유연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물벼룩의 경우처럼 생긴 모습만 유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물들의 ‘살아가는 방식’도 성장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유전자를 절반이나 공유하는 한 가족 형제들을 자원이 부족한 환경과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 나누어서 자라게 하면, 형제들의 생활사 전략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2005년에 발표된 독일·스페인 공동 연구팀의 실험 연구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일부 보여준다.

이들에 따르면, 생애의 초기에 자원 부족을 겪은 금관조 암컷은 나중에 먹이가 풍부하게 공급되더라도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자매 금관조보다 더 작은 알을 낳아서 몸 크기가 더 작은 새끼를 생산한다고 한다.

이처럼 성장기에 환경 조건에 따라 발현하고 형성된 생활사 특성은 그 동물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생활사 전략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태어나 자라는 동안 자원 부족을 경험한 금관조는 미래에도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키워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성장기에 좋지 않은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활사 전략이 결정된다. 즉, 작은 새끼를 낳는 생활사 전략을 통해서, 번식에 지나친 투자를 하지 않도록 조절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에 따라 생활사 전략을 바꾸는 능력은 동물이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국 옥스퍼드의 와이텀 숲은 대표적인 자연 생태 실험실로 19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숲에 서식하는 박새의 번식을 위한 인공 둥지를 달고 모든 박새에 개체 인식을 위한 가락지 표시를 해서, 성장과 번식 등 모든 개체의 일생 동안 벌어지는 일을 기록해 왔다.

기후 변화에 의해 이른 봄의 기온이 높아지면서 박새 새끼가 먹기 좋은 통통한 애벌레가 발생하는 시기도 앞당겨지고 있다. 애벌레는 금방 자라서 박새가 잡기 힘든 나비나 나방으로 성장한다. 박새 부모도 거기에 맞추어 번식을 서두르지 않으면 나중에 막상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났을 때 배를 곯게 될지도 모른다.

기후 변화를 겪으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와이텀 숲의 박새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옥스퍼드대학의 조류연구팀이 수십년 동안 와이텀 숲의 박새를 연구해서 200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면, 기온이 높아질수록 박새들의 번식 시기가 앞당겨지는 것으로 생활사 전략이 변했다고 한다.

이 결과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일찍 번식하는 개체들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자연의 선택을 받아서 박새의 생활사 전략이 ‘진화’를 이뤄온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생활사를 결정하는 다양한 유전형의 빈도가 변화해 일어나는 진화적 변화는 꽤 짧은 동안에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유전자 형질이 염기서열의 변화를 거쳐 진화하는 것과 유전자 염기서열은 바뀌지 않더라도 그 발현이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유연성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위의 연구가 발표된 지 2년 뒤에 옥스퍼드의 조류연구팀과 에든버러의 양적 유전학 연구팀이 공동연구 결과를 진화학술지 <에볼루션>에 발표했다. 와이텀 숲의 박새 데이터를 개체군의 족보에 대입하는 양적 유전학 연구에 의하면, 놀랍게도 번식 시기는 변했어도 이를 결정하는 유전형의 다양성은 함께 변동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와이텀 숲의 박새 개체군에서 유전자 정보는 변하지 않으면서 다만 환경에 반응해 유전자의 발현 형태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럴 리는 없어 보이지만, 다행히 기후 변화가 멈추어 서늘한 이른 봄 기후를 되찾으면? 변하지 않고 보존된 유전자 덕분에 새로 태어나는 박새는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이번에는 번식 시기를 늦추는 생존 전략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기후 변화에 따라 유전자 정보 자체에 변화가 생기는 진화가 일어나, 아예 일찍 산란하는 유전자를 지닌 박새들이 많아진다면 어떨까? 이게 더 효과적일까? 당장엔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적응 과정에서 유전형 자체의 다양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대를 거듭하며 복잡한 기후 변동을 겪으면서 박새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돌연변이의 축적 덕분에 유전자 염기서열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속도에 비해서 지나치게 빠른 자연 선택에 의해, 급속하게 유전적 다양성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환경 변화에 맞춰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 없이도 유전자가 발현되는 표현 형질을 적절히 변화시켜 이득을 볼 수 있는 유연성이야말로 탁월한 생물의 전략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물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다름이 늘 생물 본질, 또는 유전자의 다름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전자가 다른 개체들도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근본적인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살아가는 전략은 물벼룩이나 박새에게만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김신연 스페인 비고대학교 생물학과 연구교수

※이 글은 사이언스온 연재물 ‘동물들의 생활사, 생존의 전략’에 실린 글을 필자가 다시 구성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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