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384

지식 성장에 대한 낙관론

지식 성장에 대한 낙관론 진리가 자기-계시적이 (데카르트 학파와 베이컨 학파가 생각한 바와 같이) 아닐지라도, 확실성이 도달될 수 없을지라도 지식에 관한 인간의 상황은 결코 절망적이 아니다. 반대로, 그 상황은 고무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세계와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우리 앞에 두고 여기 우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해력은 놀라울 정도로 그 과제에 거의 적합함을 ㅡ 우리의 가장 기이한 꿈들 중에서 우리가 꾼 적이 있는 것보다 더 적합한 그 과제에 적합한 ㅡ 우리가 발견한다. 시행착오에 의하여 우리는 실제로 정말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무식한지 우리는 배운다 ㅡ 등산을 할 때 올라가..

아테네에서 인도주의의 시작

아테네에서 인도주의의 시작 이제 나는 히피아스(Hippias)의 말을, 계몽사조와 프랑스혁명의 이념들을 고취한 인도주의적 신념의 성명서로서 ㅡ 아마도 최초의 성명서 ㅡ 본다; 모든 사람은 형제들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분할하고 예방될 수 있는 많은 불행의 근원인 것은 규약적이고 사람이 만든 법률과 관습이라는 것; 그리하여 법률개정에 의하여 ㅡ 사법개혁에 의하여 ㅡ 사람들이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이 이념들에 의하여 칸트가 또한 고무되었다. 그리고 쉴러(Schiller)는 규약적 법률을, 엄격하게 (‘streng’) ㅡ 베토벤은 ‘건방지게’라고 (‘frech’) 말한다 ㅡ 인류를 구분하는 ‘유행’으로서 말한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권, 1971년, 333-33..

예수는 고난을 당하는데 교회는 성공을 노린다

예수는 고난을 당하는데 교회는 성공을 노린다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 서구적 목표들인 인도주의, 자유, 평등이 기독교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는 틀림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심지어 자유의 역사를 향하여 유일하게 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합리적인 태도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에 우리가 책임을 진다는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그 역사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만이 우리를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하느님이 스스로 현시하여 자신의 판결을 드러낸다는 이론은 세속적 성공이 최종심의 판사이며 우리 행동의 정당화라..

교육은 어떻게 타락했는가

교육은 어떻게 타락했는가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윤리 교육뿐 아니라 지식 교육도 부패했다. 그 교육은 광휘인 사물들이 언급되는 방식에 대한 찬사에 의하여 왜곡되는데 그 찬사는 언급되는 것들에 (그리고 실행되는 것들) 대한 비판적 평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 교육은 우리가 배우인 역사의 무대가 지닌 광휘라는 낭만적 관념에 의하여 왜곡된다. 우리는 그 무대의 관람석에 목적을 두고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다른 개인들의 중요성과 연계하여 자신의 중요성을 온전하게 평가하도록 사람을 교육하는 문제가 고스란히, 명성과 운명에 관한 이 윤리에 의하여 철저히 뒤죽박죽되었다. 그리고 권력의 역사에 대한 이 윤리의 낭만적 견해를 지닌 그리고 이 윤리의 낭만적인 종족적 도덕성을 지닌 고전문학에 아직도 근거한 교육체계를 ㅡ ..

역사에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부여하려면

역사에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부여하려면 역사에 의미가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치권력의 역사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 역사를 충격 속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도, 우리가 그 역사를 잔인한 농담으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 시대에 우리가 그 해결을 시도하려고 결심하는 권력정치의 저 문제들에 눈을 두고, 우리가 그 역사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사회를 위한, 이성의 지배를 위한, 정의(正義)와 자유 및 평등을 위한, 그리고 국제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투쟁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역사에는 목적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이 목적을 우리가 역사에 부과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에 의미가 없을지라도, 우리..

역사주의는 옹호될 수 없고 양심적 신앙이 아니다

역사주의는 옹호될 수 없고 양심적 신앙이 아니다 역사주의는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양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어떤 종교와도 상충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유인즉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그리고 그 행동이 역사 과정에 미치는 반향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최고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서 그런 종교가 역사를 향한 합리주의적 태도와 틀림없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 없이 행동하는 것, 사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져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확실성이 필요하지 않다. 종교는 특히, 꿈과 소원성취의 대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는 복권을 쥐고 있거나 보험회사의 약관을 쥐고 있는 것을 닮아..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의미’의 뜻에 관한 문제를 시작하고 싶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의 의미’에 대하여 혹은 ‘삶의 의미나 목적’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명백하게 알고 있음을 나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는 의미인 이런 의미에서, 나는 답변한다: 역사에 의미가 없다. 이 견해에 이유를 대기 위하여, 먼저 사람들이 역사에 의미가 있는지를 물을 때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저 ‘역사’에 관한 것을 나는 말해야 한다. 지금까지 마치 역사에 설명이 필요 없는 양 ‘역사’에 관하여 나 자신이 말했다. 저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말하는 의미로서의 ‘역사’는 존재..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25장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번역 수정본)

결론 25장: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I 이 저서의 종점에 다가가면서, 이 여러 장에서는 역사주의에 대한 전체 내력과 같은 것으로 의도된 것이 없음을 나는 다시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그 여러 장은 그런 내력에 대하여 산재한 극소수의 기록일 뿐이며 게다가 다소 개인적인 기록이다. 게다가 그 여러 장이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에 대하여 일종의 비판적인 소개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장들의 이 특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역사주의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혹은, 내가 말할 것과 같이, 비도덕적인) 철학이고, 우리 문명이 시작된 이래 그와 같은 것이 아주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정치 그리고 도덕의 근본적인 문제를 토론하지 않고 역사주의의 편력에 관하여 비평하는 것은 가능..

역사주의가 보지 못하는 것

역사주의가 보지 못하는 것 역사주의의 동기들 중 하나가 역사주의자가 허용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안들 외에 세 번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역사주의자가 알지 못한다는 것인 듯하다: 세계가 우월한 권력들에 의하여, ‘본질적인 운명’에 의하여 혹은 헤겔적 ‘이성’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나 아니면 세계는 도박의 수준에서 비합리적인 단순한 기회의 바퀴라는 것. 그러나 세 번째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세계 안으로 이성을 도입할 것이라는 점; 세계는 진보하지 않을지라도, 협력에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우리가 진보할 것이라는 점. 이 세 번째 가능성은 H. A. L 피셔(Fisher)에 의하여 그의 저서 유럽사(History of Europe)에서 (I권, vii쪽,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다음과 같이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