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415

실재를 말하려면 논박을 수용하라

실재를 말하려면 논박을 수용하라 논박에 (토끼들이나 물방울들이나 속도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것과 같은) 직면하여 우리가 원칙을 근거로, 우리의 서술들을 방어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는 실재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논박을 수용한다는 조건에서만 우리는 실재에 관하여 말한다. 라일 교수의 언어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논박을 준수하는 방법을 안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실재에 관하여 말하는 방법을 안다. 이 각오 즉, ‘방법 지식’을 언명하고 싶으면, 우리는 과정의 규칙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그렇게 해야 한다. 실행 규칙만이 여기에서 우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한데, 이유인즉 실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실행이기 때문이다. IX 나의 마지막 언급들로 ㅡ (c)에 관한 ㅡ 인하여 우리..

수학적 등식은 보편적으로 유효한가

수학적 등식은 보편적으로 유효한가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적용이다. 이 의미에서 ‘2 + 2 = 4’는, 누군가가 두 개의 사과를 바구니에 넣고 다시 두 개를 넣고, 바구니로부터 사과를 꺼내지 않으면, 바구니 안에 네 개의 사과가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이 해석에서 ‘2 + 2 = 4’라는 서술은 특정한 물리적 사실들을 계산하는 데, 다시 말해서 기술(記述)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며, ‘+’라는 부호는 물리적인 조작을 ㅡ 특정한 것들을 다른 것들에 물리적으로 보태는 것을 ㅡ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상적으로 논리적인 상징을 기술적[記述的]으로 해석하는 일이 때때로 가능함을 안다.) 그러나 이 해석에서 ‘2 + 2 = 4’라는 서술은 논리적 이론이라기보다는, 물리적 이론..

추측과 논박 8장 과학과 형이상학의 위상에 관하여 (번역 수정본)

8장 과학과 형이상학의 위상에 관하여 (번역 수정본) 1. 칸트와 경험의 논리 이 대담에서 나는 평범한 일상적인 경험에 관하여 이야기할 의도가 없다. 오히려 과학이 경험에 근거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경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의미에서 ‘경험’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있다. 그러나 과학에서 경험이란 결국 평범한 일상적인 경험의 연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말해야 할 것은 대체로, 일상적 경험에 또한 적용될 것이다. 추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하여 나에게는 한 가지 구체적인 경험과학의 ㅡ 뉴튼 역학 ㅡ 논리적 위상을 토론할 의도가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청중들이 물리학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할 일 중 한 가지 일과, 철학자가 이룬 최고의 업적에 기록..

과학적 이론과 비-과학적 이론

과학적 이론과 비-과학적 이론 이제 서술이나 이론의 논리적 및 경험적 논박불가능성은 쉽게 그 서술이나 이론의 허위성과 일치될 수 있다. 논리적 논박불가능성의 경우에 모든 경험적 서술과 그 서술의 부정 모두가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논박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오늘은 월요일이다’와 ‘오늘은 월요일이 아니다’라는 두 가지 서술 모두가 논리적으로 논박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논박 불가능한 거짓 서술이 존재한다고 즉각적으로 귀결된다. 경험적 논박불가능성에 대해서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경험적으로 논박 불가능한 서술에 관한 가장 간단한 사례들은 소위 엄격하거나 순수한 존재서술들이다. 여기에 엄격하거나 순수한 존재서술의 사례가 있다. ‘두 번째로 큰 진주보다 열배나 더 ..

결정론, 관념론 그리고 비합리주의 비판

결정론, 관념론 그리고 비합리주의 비판 철학적 이론의 전형적인 사례는 경험의 세상에 관한 칸트의 결정론 교설이다. 칸트는 실제로 비결정론자였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상태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마련되면, 우리가 일식이나 월식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하게 확실히 우리의 미래 행태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터이라고 말했다. 더 일반적인 용어들로, 사람들은 결정론적 교설을 다음과 같이 언명할 수 있을 터이다. 경험적 세상의 (혹은 현상적 세상의) 미래는 그 세상의 현재 상태에 의하여, 그 세상의 제일 작은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미리 결정된다. 또 다른 철학적 이론은 예를 들어 버클리(Berkeley)나 쇼펜하우어의 관념론이다; 우리는 다음 논지에..

이론에서 관찰의 역할

이론에서 관찰의 역할 이론들은 관찰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았다. 그러나 이론들은 관찰들과 충돌한다: 이론들은 관찰한 것들과 모순될 수 있다. 이 사실로 인하여 이론이 거짓임을 관찰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론들을 관찰들에 의하여 논박하는 가능성은 모든 경험적 시험들의 기초이다. 이유인즉 모든 엄격한 시험처럼, 이론 시험은 항상 시험 후보로 오른 이론이 오류라는 것을 ㅡ 다시 말해서, 이론이 거짓 주장을 수반한다는 것 ㅡ 증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관점에 비추어, 모든 경험적 시험들은 그러므로 논박 시도들(attempted refutations)이다. 결론적으로 라플라스(Laplace) 이래 진리 대신 적어도 고도의 확률을 우리들의 이론에 귀속시키기 위한 시도들이 수..

칸트, 뉴튼 그리고 아인슈타인

칸트, 뉴튼 그리고 아인슈타인 경험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자연과학과 경험이 조금이라도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칸트는 자신의 경험과 자연과학에 관한 이론(theory of experience and of natural science)을 구축했다. 나는 이 이론을 경험에 관한 역설을 해결하려는 진정으로 영웅적인 시도로서 칭찬하지만, 나는 그 이론이 잘못된 질문에 답하여 부분적으로 무관하다고 믿는다. 경험이라는 수수께끼의 위대한 발견자인 칸트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조금도 그의 찬란한 업적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나는 서둘러 부언한다. 이 실수는 무엇이었던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칸트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철학..

뉴튼 이론은 관찰로부터 도출되지 않았다

뉴튼 이론은 관찰로부터 도출되지 않았다 뉴튼의 이론이 관찰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주장은 여기서 세 가지 논점을 토대로 비판될 것이다: 첫째, 그 주장은 직관적으로 믿어질 수 없다, 특히 우리가 이론의 특징을 관찰-서술들의 특징과 비교할 때. 두 번째, 그 주장은 역사적으로 거짓이다. 세 번째, 그 주장은 논리적으로 거짓이다: 그 주장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이다. 첫 번째 논점을 ㅡ 관찰들에 의하여 뉴튼 역학이 참임을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믿어질 수 없다는 것 ㅡ 검토하자. 이것을 알기 위하여 뉴튼의 이론이 관찰-서술과 얼마나 철저히 다른지를 우리가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우선 이론은 절대적으로 정확한 주장을 수행하는 반면, 관찰은 항상 부정확하다. 게다가 뉴튼 자신의 시대에 정확성에 관하여 ..

칸트와 뉴튼의 천체 역학

칸트와 뉴튼의 천체 역학 철학자가 할 일 중 한 가지 일과, 철학자가 이룬 최고의 업적에 기록될 한 가지 업적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전에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나 문제 혹은 역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업적이다. 새로운 문제를 최초로 알아서 이해하는 철학자는 우리의 태만과 자기만족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 철학자는 흄(Hume)이 칸트에게 수행했던 일을 우리에게 수행한다: 그 철학자는 우리의 ‘독단적 수면’으로부터 우리를 깨운다. 그 철학자는 우리 앞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다. 자연과학의 수수께끼를 분명하게 이해했던 최초의 철학자는 칸트였다. 칸트 이전이든 이후든, 자연과학의 수수께끼에 의하여 그렇게 심하게 동요된 철학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ㅡㅡㅡㅡㅡㅡㅡ..

칸트는 불우한 유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칸트는 불우한 유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러나 칸트 자신은 계몽사조의 사상을 어떻게 기술(記述)하는지 살펴보자: 계몽사조는 스스로 부과한(self-imposed) 보호 상태로부터... 외부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 보호 상태가 지성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을 지도자의 도움 없이 사용하는 용기나 결심의 부족에 기인한다면 그런 보호 상태를 나는 ’스스로 부과한‘이라고 부른다. Sapere aude! 당신 자신의 지성을 과감하게 사용하라! 이것이 계몽사조의 전쟁 구호이다. 칸트는 여기서 매우 개인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생애의 일부이다. 빈곤에 가까운 환경 속에서와, 경건주의의 편협한 관점 속에서 ㅡ 엄격한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