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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지진 참사, 정치의 책임을 묻다 / 김창엽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4. 30. 08:13

사설.칼럼칼럼

[세상 읽기] 네팔 지진 참사, 정치의 책임을 묻다 / 김창엽

등록 :2015-04-29 18:45

 
보건원조 사업을 돕느라 2010년부터 3년간 네팔을 드나들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 사이에 있는 람중이 사업지역 가운데 하나였는데, 놀랍게도 이번 지진의 진앙지란다. 진심과 열정을 가진 그곳 사람들이 눈에 선한데, 이 사고에 무사할까. 안타깝게도 아직 피해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온 나라의 사정이 딱하고 아프다. 매일 수백, 수천으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경제가 10년 이상 후퇴할 것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성금 얼마를 보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 않으니 더 답답하다.

생명을 명분 삼아 그곳에 의료보험과 병원을 만들려고 애를 썼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허망함에 분노가 앞선다. 재난의 절반, 그리고 고칠 수 있는 일 대부분이 사람 탓이라 더 그렇다. 몇년째 큰 지진의 가능성을 경고했다니 몰랐을 리 없다. 가끔 가서 잠시 머문 나도 여러 번 들었던 소리다.

충격과 피해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곳곳의 낡은 집은 물론이고 새로 짓는 건물 역시 작은 충격조차 견딜까 싶었다. 도시의 인구집중과 난개발, 이를 따르지 못하는 사회기반시설은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회적 대비와 조처를 못했으니 참사는 적어도 절반의 인재다. 돌이켜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될까. 하지만 자연재해가 인재로 바뀌는 일은 또 되풀이될 터이니 마땅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사고 가능성과 대비가 모두 뻔한데 왜 이토록 무력할까. 한 가지 원인만 꼽는다면 가난에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의 살림이 어떠할 것이며, 그 구성원은 또 무슨 여력이 있을까. 가난이 체제화, 제도화되면 부자조차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물론 이 나라의 가난에도 이유가 있고 특히 그것이 오래 지속된 데는 구조적 요인이 작용한다. 국제정치의 역학과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불평등은 언급하는 것으로 그친다. 개발도상국이라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비슷한 처지임을 모르지 않아서다.

이 나라로 한정하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정치야말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랜 내전을 탓할 수도 있으나, 2008년 공화정이 된 뒤에도 난맥의 정치는 별반 다르지 않다. 아직 헌법도 만들지 못한 상태이니 짐작하고도 남는다.

정치가 혼란과 교착을 거듭하는 사이 지도력은 약화되고 사회는 갈라졌으며 국정 기조는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제 또 바뀔지 정치가 불안정하면 관료는 움직이지 않고 정책은 동요하는 법, 빈곤과 재난 대책이 없거나 무력한 것은 당연하다. 큰 위기를 맞은 지금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는 더 심해졌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허약한 정치의 조각들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되돌아보면 그때 네팔에서 추진하던 보건사업은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파트너가 되어야 할 사람들은 하루 앞을 장담하지 못했고 작은 사업조차 책임지길 망설였다. 담당 공무원은 어찌 그리 자주 바뀌는지.

재난의 불행을 두고 정치의 책임을 묻는 것은 회고의 비판이 아니다. 마땅한 대안이 모자란다고 뜻이 공허하다 할 수도 없다. 자연재해는 되풀이되고 쉽게 인재와 결합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생각하면 어디 네팔만 그럴까. 세월호 사고와 그간의 대응이 웅변하듯, 어떤 나라 어떤 재난에도 정치의 책임은 무겁다. 사람을 살리는 정치로 만들어야 하는 것을 차마 남의 일이라 하지 못한다.

이번 참사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긴급구호를 위한 한국 정부의 신속하고 ‘충분한’ 행동을 바란다. 구호와 복구가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는지도 다시 정치에 달렸다. 한국과 네팔 두 곳 모두의 정치를 주목한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