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한손을 묶고 하루를 산 이유[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⑧]
허문명 기자 입력 2021. 03. 03. 10:01 댓글 16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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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집 짓는 게 헌집 고치는 것보다 쉬워
● 아웃사이더를 신경영 비서실장으로 발탁
● 두뇌산업으로 모든 걸 바꿔라
● 사장보다 몸값이 비싼 사람을 데려오라
2002년 6월 이건희 당시 삼선전자 회장은 ‘S급 핵심인력 확보·양성 사장단 회의’를 긴급 소집해 “사장단 인사평가 점수가 100점 만점이라면, 그 가운데 30점을 ‘핵심 인력’을 얼마나 확보했느냐에 두겠다”고 선포했다. [삼성전자 제공]
원로 삼성맨들 사이에서 이건희 회장에 대한 공개적인 항명으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스푼 사건'은 신경영 메시지를 의심했던 사장단은 물론 전 임직원들에게 '과거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회장의 의지를 만방에 알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현명관 전 비서실장 말이다.
"회장은 해외 회의에서 중역들을 대상으로 밤새 강의하고, 설득하고, 분임토의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임직원들이 내 마음의 50%만이라도 이해하고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밑에서 안 움직여주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스푼 사건'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회장은 정말 집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장들도 서서히 회장의 '도박'을 받아들이며 하나 둘 개혁의 강물로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회장의 판단은 전적으로 옳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몇 년 뒤 IMF (외환위기)를 당하고서야 이익중심, 품질중심, 기술과 혁신이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새집 짓는 게 헌집 고치는 것보다 쉬워현명관의 말처럼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그로부터 꼭 5년 뒤인 1998년 대한민국이 IMF 라는 미증유의 강펀치를 맞았을 때 빛을 발한다.
물론 초기에는 삼성도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허둥대긴 했지만 빠른 회복력을 보이며 오히려 위기를 발판으로 삼아 도약할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이 회장의 초일류 기업, 즉 '글로벌 스탠더드'를 목표로 했던 질(質) 중시 개혁 덕분이었다는 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경영 선언 당시 상황실장이나 다름없었던 이학수 전 삼성전략기획실장도 IMF 때 삼성의 구조조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월간조선' 2000년 7월호 인터뷰).
"솔직히 1993년, 1994년에는 회사 임직원들이 절박하게 느끼질 않은 겁니다. 회사가 실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는데 사업체를 처분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줄이고 해외지점을 폐쇄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에 이런 여건이 조성되지도 않았지요. 종업원의 의식이 따라오지 못하고 일반 기업은 모두 매출 경쟁을 하고 몸집 불리기를 하는데 우리만 판다, 줄인다 하는 것이 먹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회장은 그 문제를 계속 강조했고 애를 썼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해고된 사람도 있었지요. 결국 이론적으로 공부는 됐는데, 실행이 늦추어진 거죠. 그러다 IMF 사태가 닥치니까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구조조정이 급류를 탄 겁니다."
당시 월간조선은 IMF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삼성에 대한 심층 기획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 회장은 아주대 경영대학 조영호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신경영 핵심은 세계 일류 기업이 되기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향한 문화 혁명이었다‘는 취지로 이렇게 말한다.
"신경영은 한마디로 좋은 물건 만들어서 우리도 한번 21세기에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할 정도로 과거의 관행과 습관, 제도, 일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을 근본부터 철저히 바꿔보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무척 어렵습니다. 저는 변화의 어려움을 오른손을 묶어 놓고 왼손으로만 활동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를 귀찮아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변화의 방법으로 '나부터, 쉬운 것부터, 윗사람부터'라고 얘기했습니다."
실제로 이 회장은 1993년 7월 일본 오사카 회의에서 실제로 "오른 손을 묶고 24시간 생활해보기도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변화'라는 것을 지식이나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기 위해 직접 한손을 묶어 보고 살아보는 실험까지 했다는 말을 들으면 이 회장의 절박감과 집요함이 전해져 소름이 돋는다.
이 회장이 당시 인터뷰를 한 때는 신경영 선언을 한 지 만 7년 만이었다. 그는 "신경영 추진 시 가장 큰 걸림돌이 뭐였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50년 이상 국내 정상의 위치를 누려오면서 굳어진 대기업병(病)과 변화를 피해가려는 무사안일주의를 없애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개혁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내부 문제라고 얘기합니다만, 신경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신경영 초기에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걸림돌이었습니다. 헌집을 고치기보다 새집을 짓는 게 훨씬 쉽다는 것을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그 다음으로는 변화에 대해 총론은 좋다고 해놓고 각론에 들어가서는 반대를 일삼는 조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 인프라나 시스템이 과거 개발시대 잔재가 많이 남아 질 중심의 변화를 적극 수용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던 점도 어려웠던 점으로 들 수 있습니다."
-(회장께서는) IMF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위기론을 제기했습니다.
"IMF 위기가 있기 전부터 우리 경제에는 여러 적신호들이 있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경고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실 이 위기는 1995년부터 본격화 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그 당시 우리 경제는 엔고 호황의 반짝 경기 때문에 그 실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수년 전부터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 시기에 구조조정을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몸집을 불리고 거품을 걷어내지 못해 결국 경제난국을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말했던 것도 미구에 닥칠 이러한 위기에 미리 준비하자는 뜻이었는데,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와 엔고의 호기를 모두 놓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쉽기만 합니다.
아웃사이더를 비서실장으로어느 조직이나 그렇지만 월급쟁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채찍과 당근은 인사다. 이 회장은 '스푼 사건' 직후 최측근이었던 이수빈 비서실장을 경질하고 후임자로 깜짝 놀랄만한 사람을 앉히는데 바로 현명관 당시 삼성건설 사장이었다.
삼성맨들은 경악했다. 현명관은 감사원 공무원 출신으로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관리부장으로 삼성에 합류한 인물로, 전자나 생명 같은 주력 계열사 사장을 맡은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룹의 사령탑을 지휘할만한 사내 기반이 전무한, 한마디로 '아싸(아웃사이더) 중에 아싸'였던 것이다. 신경영이라는 전무후무한 발상으로 고독한 '마이 웨이'를 선언한 이 회장은 새로운 시대 그의 손발이 돼 현장을 지휘할 사람으로 왜 비주류 인물을 선택했을까. 여기에도 이회장의 파격적인 상상력이 녹아있다. 현명관의 회고다.
"회장과의 처음 독대는 LA 회의 때였습니다. 삼성의 문제가 뭐라고 보냐는 질문에 '감사원보다 더 관료적'이라고 했더니 거침없이 나에 대한 여러 질문을 하시더군요. 석 달 뒤인가 갑자기 한남동 댁으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습니다. '삼성그룹 운영에 고칠 것이 없느냐'고 물으시기에 '업종별로 특성이 있는데 획일적으로 경영 방향이나 방침이 정해져 있어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전자업이면 전자, 금융업이면 금융, 서비스업은 서비스업으로 나눠 소그룹별로 경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그러더니 갑자기 저더러 '현 사장, 비서실장 하세요' 이러는 거 아닙니까. 너무 놀랐지요. 하지만 저는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공채 출신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삼성의 2인자나 다름없는 높은 자리를 맡기에는 자격이 안 된다면서 말이지요. 그랬더니 회장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른 걸 다 주물러 본 사람은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삼성의 과거부터 몸을 담지 않았으니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소리 말고 그룹의 명령으로 알고 해 달라.'"
현 전 실장은 "이후 나도 여러 기관에서 기관장을 맡아 개혁을 주도해본 적이 있지만 당시 이회장의 과단성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며 "과연 나 같으면 그런 인사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였다"고 말했다.
두뇌산업으로 모든 걸 바꿔라
2011년 7월 29일 경기 수원시 매탄동 수원디지털시티에서 열린 선진제품비교전시회에 참관한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 이 회장은 이날 사장단에게 소프트기술과 최우수 인재 확보, 특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금 당장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삼성전자 제공]
신경영을 현장지휘 할 사령관으로 현 전 실장을 지목한 데에는 그의 생각이 회장이 갖고 있던 선택과 집중 전략에 들어맞았기 때문으로도 보여 진다. 주지하다시피 고인이 삼성 경영을 진두지휘하는 회장직에 오른 해는 1987년 11월이다. '신동아'는 그로부터 6개월만인 1988년 5월호에서 국내 언론 최초로 이 회장을 단독 인터뷰하는데, 여기서 회장은 '제2 창업'의 의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청사진을 밝힌다.
"제2 창업은 각종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자는 겁니다. 우선은 정신적인 변화를 찾아야 하겠고, 다음은 기술적으로 삼성이 추구하는 전자 반도체 항공 유전공학 분야에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소프트웨어 개념이 거의 안 돼 있어요. 천만 달러짜리 컴퓨터로 숫자 계산이나 한다면 어리석지요. 그걸 이용해 1억 달러의 효과를 낼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신경 써야 되겠지요. 단순노동 저임(금)만으로는 국제화 시대를 이겨나갈 수가 없어요. 두뇌산업 쪽으로 모든 개념을 바꿔가야 하겠다는 것이 바로 제2 창업의 의미입니다. 경영이란 개념을 세분하면 설계 개발 제조 판매 애프터서비스 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부단히 변하고 있어요. 10년 전과 지금은 판이하지요. 옛날의 기계는 으레 고장이 났는데, 앞으로는 고장이 거의 안날 겁니다. 그러면 애프터서비스의 개념도 달라지지요. 그런 식으로 변화에 적응하는 체질개선이 꾸준히 이뤄져야 합니다."
신필렬 전 삼성라이온즈 사장은 1972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비서실 재무팀에서 일했다. 1976년부터 이병철 회장의 비서팀장을 맡았다. 그는 "선대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기업경영을 지휘했던 시대 자체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면서 "이건희 회장의 취임은 한국이 국내외적으로 큰 변곡점을 맞이하던 시기에 절묘하게 이뤄졌다"고 했다.
"선대 회장이 진두지휘 하던 시절은 만들면 팔리는 제조업의 시대였다 보니 기업에 필요한 리더십도 달랐고 인재도 달랐습니다. 관리자 출신이 아니면 사장이 안됐습니다. 제조업이라는 것은 투입한 것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분석을 잘 하고 원료 투입이라든지 제품이 제조돼서 나오는 공정 관리를 잘 하면 되는 거지요. 당연히 마케팅이란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엔지니어들의 역할이 크지 않았습니다. 삼성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공장들이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공대를 졸업하면 지방 근무를 해야 했는데 마누라들도 싫어하고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하다 보니까 엔지니어들이 취직을 해놓고도 금방 포기하고 문과로 방향을 틀어 경영대학원에 들어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 경영학과 석사 과정에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다시 공부를 선택한 '엔지니어'들로 붐비는 진풍경이 벌어졌으니까요."
삼성에서 출세하는 인재상도 달랐다고 한다.
"선대회장 때는 회장이 뭘 탁 물어보면 숫자가 좔좔 나오는 사람들이 빛을 봤습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제조업 중심의 삼성을 엔지니어 중심, 관리 중심에서 자율과 창의력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장들의 역할도 숫자 잘 외는 사람이 아니라 '인재를 잘 찾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장보다 몸값이 비싼 사람들을 데려오라실제로 이 회장은 1993년 6월 29일 런던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인공위성이 도저히 안 되지만 10년 후에는 꼭 해야 된다고 가정하면 나는 최고의 인공위성 전문가를 데리고 오겠다. 비록 그가 실무에 맞든 안 맞든 성격이 고약하든 말든, 어쨌든 일단 일급 인재라면 그 사람을 안 데려오는 것보다 데려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신필렬에 따르면 회장은 늘 '사장보다 급여가 비싼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임직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아니, 어떻게 사장보다 월급을 더 주고 사람을 데려 오라는 말인가. 계열사 사장들 입장에선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처음에는 다들 자기들보다 보수가 낮은 사람을 뽑아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회장은 '이런 사람 뽑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장보다 월급을 3배~5배를 더 주더라도 더 나은 사람을 뽑아오라'고 불호령을 내렸죠. 그것 때문에 사장단들이 혼이 아주 많이 났습니다."
이후 삼성 그룹 사장들은 자신들 몸값보다 비싼 인재들을 찾기 위해 해외를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수한 인재를 몇 명 데려오느냐가 고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회장의 이런 노력이 현재의 삼성을 일군 동력이 되었다고 신필렬은 말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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