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우리 일본은 의리와 용기의 나라라고 칭하여, 그 무사가 표한하여 과단, 충성스러워 솔직함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부끄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중 아시카가(足利) 말년에 이르러 천하의 대란, 호걸은 있는 곳에 할거하여 공격이 멈추는 때가 없고, 대체로 일본에서 싸움이 유행함은, 이 때 전후보다 성행함이 없다. 한 번 패하여, 국가를 망하게 한 자가 있고, 한 번 승리하여, 집안을 일으킨 자가 있고, 문벌도 없고 유래도 없고, 공적과 명성이 자유자재, 부귀를 순간에 얻을 수 있다. 문명의 정도에 앞뒤의 차가 있어도, 이것을 저 로마의 말기에 북쪽 오랑캐가 침입한 시대와 비교하여 비슷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추세 가운데에 있어서는 일본의 무사에게도 스스로 독립과 자주의 기상을 일으켜, 혹은 저 독일의 야만인이 자주와 자유의 요소를 남긴 것처럼, 우리 국민의 기풍도 일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본 장의 첫머리에서 말한 권력의 편중은, 역사시작 처음부터 인간 교류의 미세한 곳까지도 침투하여, 어떤 진동이 있어도 이것을 파괴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무사가 쾌활하고 자유로운 것 같아도, 그 쾌활하고 자유로운 기상은 한 몸의 강개함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정하여 일개의 남아라고 생각하여, 몸을 가장 중시하여, 자기 혼자의 자유를 즐긴다는 마음이 아니라, 틀림없이 외부의 무엇에 유혹되어 발생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무엇을 빙자하여 발생을 도운 것이다. 무엇을 외부의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 때문이고, 가문의 이름 때문이고, 주군 때문이고, 부친 때문이고, 자기의 신분 때문이다. 대체로 이 시기의 전쟁에서 명분으로 하는 바는 반드시 이런 것 등의 제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또는 조상의 가문 이름이 없고, 주군과 부친의 신분이 없는 자는, 일부러 그 명분을 만들어 핑계로 이용하는 꼴이다. 어떤 영웅호걸이어서 힘이 있고 지혜가 있는 자라할지라도, 그 지혜의 힘에만 의지하여 일을 하고자 기도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여기서 사건의 흔적에 드러난 것을 들어, 한 가지, 두 가지 사례를 보이겠다. 아시카가(足利)의 말년에 사방의 호걸, 혹은 그 주인을 내쫓고, 혹은 그 주군과 부친의 원수를 갚고, 혹은 조상의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고, 혹은 무사다운 면목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라 하여, 무리를 모아 토지를 압수하고, 할거하는 세력을 이루었다할지라도, 그 기대하는 바는 다만 수도(교토)로 올라가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 대체로 수도(교토)로 올라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면, 천황 혹은 쇼군을 알현하여, 그 명의를 차용하여 천하를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또는 아직 수도(교토)로 올라가는 수단을 얻지 못한 자는, 멀리 왕실의 관직을 얻어, 이 관직에 의지하여 자신의 영예를 늘리고, 그로써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재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 재주는 옛날부터 일본의 무사들 사이에 유행하는 정해진 고유한 방식이어서, 미나모토(源) 가와 다이라(平) 가의 우두머리,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다. 호조(北条)에 이르러 바로 최상의 관직을 바라지 않고, 명분을 위하여 쇼군을 두고, 신분은 5품계로써 천하의 권세를 쥔 것은, 비단 왕실을 도구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쇼군도 이용한 것이다. 그 외형을 피상적으로 판단하면 아름답고 훌륭해 보이더라도, 충분히 사건의 내부를 분석하면, 틀림없이 사람의 비겁으로부터 생긴 것이어서, 진실로 천시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아카마츠 엔신(赤松円心)의 책략을 이용하여 고후시미(後伏見) 천황의 칙서를 받고, 그 아들 고묘(光明) 천황을 세운 것과 같은 것은, 만인의 눈으로써 보아도 이것을 천황의 본심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노부나가(信長)가 처음에 쇼군 요시아키(義昭)를 손안에 넣었어도, 쇼군의 명성이 천황의 명성보다 약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곧 요시아키(義昭)를 내쫓고 곧바로 천황을 껴안은 것도, 그 정(情)이 두텁다고 할 수 없다. 어느 것도 모두 계략과 속임수가 명백한 것이어서, 대체로 천하에 눈과 귀를 구비한 자라면, 그 속내를 통찰할 수 있음이 당연하여도, 아직 그 표면에서는 충성과 신의와 절개와 의리를 부르짖어, 어린애의 놀이와 같은 명분을 핑계로 이용하여 스스로 이것을 책략을 얻은 것으로 하여, 사람들도 역시 이것에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은 왜인가? 생각건대 그 무리들 안에 있어서 위와 아래가 함께 크게 이득을 보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사는 역사시작 초부터 이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교류의 규칙에 따라, 권력 편중의 속에서 길러져, 항상 사람에게 굽힘으로써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저 서양의 국민은 자기의 지위를 중시하여, 자기의 신분을 귀하게 여기고, 각각 그 권리와 의무를 지속적으로 확대함에 비교하면, 그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과 소란의 세상이라할지라도, 이 교류의 법칙은 파괴할 수 없다. 일족의 우두머리에 대장이 있고, 대장 밑에 가노(家老)가 있고, 그 다음에 기마병이 있고, 또 가치(徒士: 하급무사)가 있고, 그로써 아시가루(足軽: 최하급 무사)와 쥬겐(中間: 하인)에 이르러, 상하의 명분이 명백하고, 그 명분과 함께 권한과 의무를 달리하여, 한 사람으로서 무리함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고, 한 사람으로서 무리함을 행하지 않는 자가 없다. 무리함에 억압당하고, 또 무리하게 억압하고, 이것을 향하여 굴복하면, 저것을 향하여 자부할 수 있다. 비유건대 여기에 갑을병정(甲乙丙丁)이라는 10명이 있어, 그 을(乙)인 자, 갑(甲)에 대하여 비굴한 모습을 하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있는 것 같아도, 병(丙)에 대하면 의기 양양하여 크게 자부할 수 있는 유쾌함이 있다. 그러므로 앞의 치욕은 뒤의 유쾌함에 의하여 보상을 받고, 그로써 불만을 고르게하고, 병(丙)은 정(丁)에게서 보상을 받고, 정(丁)은 무(戊)에게서 대가를 구하여, 점점 끝이 없고, 흡사 서쪽의 이웃에 빌려준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하는 것과 같다. 또 이것을 물질에 비유하여 말하면, 서양 국민의 권력은 쇠와 같아서, 그것을 팽창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고, 이것을 수축시키는 것도 역시 매우 쉽지 않다. 일본의 무사의 권력은 고무와 같고, 그 서로 붙이는 바의 물질에 따라서 수축과 팽창의 내용을 달리하여, 밑에 붙이면 크게 팽장하고, 위에 붙이면 갑자기 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이 치우쳐서 수축하고 치우쳐서 무거워지는 권력을 일체로 모아서 무사가문의 위세라고 칭하고, 그 일체의 억압을 당하는 자는 의지할 데가 없는 평민이다. 평민을 생각하면 불쌍하여도, 무사의 무리에 있어서는 위로 대장(大将)부터 밑으로 아시가루(足軽: 최하급 무사)와 쥬겐(中間: 하인)에 이르기까지, 상하 일반적인 이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이익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그 상하의 관계, 충분히 정돈되어 크게 체계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곧 그 체계적이라는 것은 무리의 내부에서, 상하 간에 사람마다 비굴함의 추태가 있을지라도, 무리가 일체의 영광으로써 굳이 스스로 이것을 자기네 영광으로 삼고, 오히려 한 개인의 지위는 버리고 그 추태를 망각하고, 달리 일종의 체계를 만들어 그것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 관습의 한 가운데서 길러져 마침내 그로써 제 2의 천성을 이루어, 어떤 물체에 접촉하여도 그 물체를 움직일 수가 없다. 위세와 무력도 굴복시킬 수가 없고, 가난과 천박함도 빼앗을 수 없고, 엄연한 무사가문의 기풍을 엿보아 알 수 있다. 그 한 국면의 사건에 관하여 한 장면의 작동에 관하여 이것을 살피면, 정말로 부러워할 수 있고 또 사모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옛날 미가와(三河)의 무사가 도쿠가와(徳川) 집안에 따라붙었던 형편도 이 한 가지 사례이다. 그 조직으로써 성립된 무사의 교류이기에, 이 교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종의 무형의 최고 권위가 없을 수 없다. 곧 그 권위가 있는 곳은 왕실에 멈춘다 할지라도, 인간세계의 권위는, 사실, 사람의 지혜와 덕행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왕실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인 지혜와 덕행이 있지 않으면 실질적인 권위는 왕실에 귀속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서인가 그 명분만을 남기고 왕실에 실권이 없는 지위를 품게 하여, 실권은 무사가문의 우두머리에게 장악하게 하려는 책략을 꾸몄던 것이이므로, 곧 당시 사방의 호걸이 수도(교토)로 올라오는 일에 열중하여, 어린애 장난같은 명분도 짐짓 남겨 이것을 이용한 까닭이다. 결국 그 근본을 찾으면, 일본의 무사에게 단지 한 개인의 기상(인디비쥬얼리티: individuality)이 없어서, 이런 비열한 소행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난세의 무사에게 단 하나의 기상이 없다)
옛날부터 세상 사람들이 등한히 간과하여 유의하지 않은 바이라도, 지금 특별히 그것을 기록하면, 일본의 무사에게는 오직 한 개인의 기상이 없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항목이 있다. 곧 그 항목이라는 것은 사람의 성명에 관한 것이다. 원래 사람의 이름은 부모가 짓는 것이어서, 성장 후 혹은 개명하는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주에 관한 물품은 사람마다의 취향에 맡겨, 자유자재일 것 같아도, 대개는 외부의 물체의 의하여 움직여, 스스로 시대의 유행에 따르는 것이어도, 사람의 성명은 의식주의 물품과 다르고, 이것을 짓는 것에 타인의 지시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설령 친척과 친구라고할지라도, 내가 원해서 상담을 받는 것이 아니면, 참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사람의 일의 형태에 나타나는 것들 중에서 최고로 자유자재일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따라서 개명을 금지하는 나라에 있어서는, 본래 그 법에 따름도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도, 개명이 자유로운 국가에 있어서, 겐스케(源助)라고 하는 이름을 히라키치(平吉)라고 고치거나, 또는 그것을 고치지 않는 자유는, 전적으로 한 개인의 의사에 맡겨, 밤에 자는 데 오른쪽을 베게로 하고 또 왼쪽을 베게로 하는 자유와 같다. 조금도 타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 일본의 무사가문에서, 이름 한 자를 하사하여 성을 허락하는 사례가 있다. 비굴하고 저열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용맹도 여전히 이것을 피하지 못하고, 쇼군 요시데루(義輝)의 이름 한 자를 하사받아서 데루토라(輝虎)로 개명한 일이 있다. 더욱 심한 것은, 세키가하라(関原) 전투 후에 천하의 통치권이 도쿠가와(徳川) 씨에게 귀속되어, 제후 도요토미(豊臣) 씨를 사칭하는 자는 두 본래 성으로 회복시켰고, 또 마쓰다이라(松平)를 사칭하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은 성 개명은 혹은 스스로 원하여 혹은 위의 명령에 의해 하사를 받는 일도 있으려니 할지라도, 어느 것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경멸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여, 개명과 성을 사칭하는 일은, 당시의 풍습이어서 사람이 마음에 두는 일이 아니어서, 지금부터 나무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의 성명을 사칭하여 마음에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심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같다. 그 증거에서는 아시카가(足利) 시대, 에이교(永享) 6년, 가마쿠라(鎌倉)의 구보 모치우지(公方持氏)의 아들이, 성년식을 하면서 이름을 요시히사(義久)로 짓는 데, 관령(管領: 쇼군 아래 고위직) 우에스기 노리사네(上杉憲実)는 여느 때처럼 무료마치(室町) 막부의 쇼군의 생전 이름을 원할 수 있다고 간언하였어도 듣지 않았던 일이 있다. 이때 모치우지(持氏)는 이미 자립의 의지가 있었다. 그 의지는 선이든 악이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천박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또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호소카와(細川) 가문에 마쓰다이라(松平)의 성을 주려고 하는 데 사양하였다고 하여, 민간에서는 이것을 미담으로 하여 전했다. 진위가 상세하지 않을지라도,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의 심정은 지금도 옛날도 같은 것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 이상 기록한 바의 성명에 관한 사건은 그다지 큰 사건도 아니라도, 옛날부터 의리가 있고 용감하다고 칭하는 무사가, 사실은 의외로 비겁함을 알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권위를 장악한 정부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 마음의 내부까지도 침범하여 통제하기에 충분하다는 내력을 밝히기 위하여, 몇 마디 말을 여기에 단 것이다.
- 일본의 무사는 기상이 없고 비겁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 제 5권 9장” 중에서 -
古来我日本は義勇の国と称し、其武人の慓悍にして果断、誠忠にして率直なるは、亜細亜諸国に於ても愧るものなかる可し。就中足利の末年に至て天下大乱、豪傑所在に割拠して攻伐止む時なく、凡そ日本に武の行はれたる、前後この時より盛なるはなし。一敗、国を亡す者あり、一勝、家を興す者あり、門閥もなく由緒もなく、功名自在、富貴瞬間に取る可し。文明の度に前後の差はあれども、之を彼の羅馬の末世に北狄の侵入せし時代に比して彷彿たる有様と云ふも可なり。此事勢の中に在ては日本の武人にも自から独立自主の気象を生じ、或は彼の日耳曼の野民が自主自由の元素を遺したるが如く、我国民の気風も一変す可きに思はるれども、事実に於ては決して然らず。此章の首に云へる権力の偏重は、開闢の初より人間交際の微細なる処までも入込み、何等の震動あるも之を破る可らず。此時代の武人快活不覊なるが如くなれども、此快活不覊の気象は一身の慷慨より発したるものに非ず、自から認めて一個の男児と思ひ、身外無物、一己の自由を楽むの心に非ず、必ず外物に誘はれて発生したるもの歟、否(しから)ざれば外物に藉て発生を助けたるものなり。何を外物と云ふ。先祖のためなり、家名のためなり、君のためなり、父のためなり、己が身分のためなり。凡そ此時の師に名とする所は必ず是等の諸件に依らざるものなし。或は先祖家名なく、君父身分なき者は、故さらに其名義を作て口実に用るの風なり。如何なる英雄豪傑にして有力有智の者と雖ども、其智力のみを恃(たのみ)て事を為さんと企たる者あるを聞かず。爰に其事跡に見はれたるものを撮て一、二の例を示さん。足利の末年に諸方の豪傑、或は其主人を逐ひ、或は其君父の讐を報じ、或は祖先の家を興さんとし、或は武士たるの面目を全ふせんがためにとて、党与を集め土地を押領し、割拠の勢を為すと雖ども、其期する所は唯上洛の一事に在るのみ。抑も此上洛の何物たるを尋れば、天子若くは将軍に謁し、其名義を借用して天下を制せんとすることなり。或は未だ上洛の方便を得ざる者は、遥に王室の官位を受け、此官位に藉て自家の栄光を増し、以て下を制するの術に用る者あり。此術は古来日本の武人の間に行はるゝ一定の流儀にて、源平の酋長、皆然らざるはなし。北条に至ては直に最上の官位をも求めずして、名目のために将軍を置き、身は五位を以て天下の権柄を握りたるは、啻に王室を器械に用るのみならず、兼て将軍をも利用したるものなり。其外形を皮相すれば美にして巧なるに似たれども、よく事の内部に就て之を詳にすれば、必竟人心の鄙怯より生じたることにて、真に賎しむ可く悪む可きの元素を含有するものと云はざるを得ず。足利尊氏が赤松円心の策を用ひて後伏見帝の宣旨を受け、其子光明天皇を立たるが如きは、万人の目を以て見るも之を尊王の本心より出たるものと認む可らず。信長が初は将軍義昭を手に入れたれども、将軍の名は天子の名に若かざるを悟り、乃ち義昭を逐ふて直に天子を挟(はさ)みたるも、其情厚しと云ふ可らず。何れも皆詐謀偽計の明著なるものにて、凡そ天下に耳目を具したる者ならば、其内情を洞察す可き筈なれども、尚其表面には忠信節義を唱へ、児戯に等しき名分を口実に用ひて自から之を策の得たるものと為し、人も亦これに疑を容れざるは何ぞや。蓋し其党与の内に於て上下共に大に利する所あればなり。日本の武人は開闢の初より此国に行はるゝ人間交際の定則に従て、権力偏重の中に養はれ、常に人に屈するを以て恥とせず。彼の西洋の人民が自己の地位を重んじ、自己の身分を貴て、各其権義を持張する者に比すれば、其間に著しき異別を見る可し。故に兵馬騒乱の世と雖ども、此交際の定則は破る可らず。一族の首に大将あり、大将の下に家老あり、次で騎士あり、又徒士あり、以て足軽中間に及び、上下の名分判然として、其名分と共に権義をも異にし、一人として無理を蒙らざる者なく、一人として無理を行はざる者なし。無理に抑圧せられ、又無理に抑圧し、此に向て屈すれば、彼に向て矜る可し。譬へば爰に甲乙丙丁の十名ありて、其乙なる者、甲に対して卑屈の様を為し、忍ぶ可らざるの恥辱あるに似たれども、丙に対すれば意気揚々として大に矜る可きの愉快あり。故に前の恥辱は後の愉快に由て償ひ、以て其不満足を平均し、丙は丁に償を取り、丁は戊に代を求め、段々限あることなく、恰も西隣へ貸したる金を東隣へ催促するが如し。又これを物質に譬へて云へば、西洋人民の権力は鉄の如くにして、之を膨脹すること甚だ難く、之を収縮することも亦甚だ易からず。日本の武人の権力はゴムの如く、其相接する所の物に従て縮張の趣を異にし、下に接すれば大に膨脹し、上に接すれば頓に収縮するの性あり。此偏縮偏重の権力を一体に集めて之を武家の威光と名け、其一体の抑圧を蒙る者は無告の小民なり。小民を思へば気の毒なれども、武人の党与に於ては上大将より下足軽中間に至るまで、上下一般の利益と云はざるを得ず。啻に利益を謀るのみに非ず、其上下の関係、よく整斉して頗る条理の美なるものあるが如し。即ち其条理とは党与の内にて、上下の間に人々卑屈の醜態ありと雖ども、党与一体の栄光を以て強ひて自から之を己が栄光と為し、却て独一個の地位をば棄てゝ其醜体を忘れ、別に一種の条理を作て之に慣れたるものなり。此習慣の中に養はれて終に以て第二の性を成し、何等の物に触るゝも之を動かす可らず。威武も屈すること能はず、貧賎も奪ふこと能はず、儼然たる武家の気風を窺ひ見る可し。其一局の事に就き一場の働に就て之を察すれば、真に羨む可く又慕ふ可きもの多し。在昔三河の武士が徳川家に附属したる有様なども此一例なり。斯る仕組を以て成立たる武人の交際なれば、此交際を維持せんがためには、止むを得ず一種無形最上の権威なかる可らず。即ち其権威の在る所は王室に止まると雖ども、人間世界の権威は、事実、人の智徳に帰するものなるが故に、王室と雖ども実の智徳あらざれば実の権威は之に帰す可らず。是に於てか其名目のみを残して王室に虚位を擁せしめ、実権をば武家の統領に握らんとするの策を運らしたることにて、即ち当時諸方の豪傑が上洛の一事に熱中し、児戯に等しき名分をも故さらに存して之を利用したる由縁なり。必竟其本を尋れば、日本の武人に独一個人の気象(インヂヴヰヂュアリチ)なくして、斯る卑劣なる所業を恥とせざりしことなり。(乱世の武人に独一個の気象なし)
古来世の人の等閑に看過して意に留めざりし所なれども、今特に之を記せば、日本の武人に独一個人の気象なき趣を窺ひ見る可き一個条あり。即ち其個条とは人の姓名の事なり。元来人の名は父母の命ずるものにて、成長の後或は改名することあるも、他人の差図を受く可きに非ず。衣食住の物品は人々の好尚に任し、自由自在たるに似たれども、多くは外物に由て動かされ、自から時の流行に従ふものなれども、人の姓名は衣食住の物に異なり、之を命ずるに他人の差図を受けざるは勿論、仮令ひ親戚朋友と雖ども、我より求て相談を受るに非ざれば喙(くちばし)を入る可き事柄に非ず。人事の形に見はれたるものゝ中にて最も自由自在なる部分と云ふ可し。法に由て改名を禁ずる国に於ては、固より其法に従ふも自由を妨るに非ざれども、改名自由の国に於て、源助と云ふ名を平吉と改る歟、又は之を改めざるの自由は、全く一己の意に任して、夜寝るに右を枕にし又左を枕にするの自由なるが如し。毫も他人に関係ある可らず。然るに古来我日本の武家に、偏諱を賜はり姓を許すの例あり。卑屈賎劣の風と云ふ可し。上杉謙信の英武も尚これを免れず、将軍義輝の偏諱を拝領して輝虎と改名したることあり。尚甚しきは、関原の戦争後に天下の大権徳川氏に帰して、諸侯の豊臣氏を冒す者は悉く本姓に復し、又松平を冒す者あり。是等の変姓は或は自から願ひ或は上命にて賜はることもあらんと雖ども、何れにも事柄に於ては賎しむ可き挙動と云はざるを得ず。或人謂へらく、改名冒姓の事は、当時の風習にて人の意に留めざることなれば、今より咎む可らずと云ふものあれども、決して然らず。他人の姓名を冒して心に慊しと思はざるの人情は、古今皆同じ。其証拠には足利の時、永享六年、鎌倉の公方持氏の子、元服して名を義久と命じたりしに、管領上杉憲実は例の如く室町の諱を願はる可しと諌めたれども聴かずとあり。此時持氏は既に自立の志あり。其志は善にも悪にも、他の名を冒すは賎しき挙動と思ひしことならん。又徳川の時代に、細川家へ松平の姓を与へんとせしに辞したりとて、民間には之を美談として云伝へり。虚実詳ならざれども、之を美とするの人情は今も古も同様なること明に証す可し。以上記す所の姓名のことは左まで大事件にも非ざれども、古来義勇と称する武人の、其実は思の外卑怯なるを知る可く、又一には権威を握る政府の力は恐ろしきものにて、人心の内部までも犯して之を制するに足るとの次第を示さんがために、数言を爰に贅したるなり。
- 福澤諭吉, “文明論之槪略, 巻之五 第九章 日本文明の由来 -
일본의 무사는 기상이 없고 비겁하다 - 문명론의 개략 5권 9장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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