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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1권 1장 논의의 기준을 정하는 일

이윤진이카루스 2012. 8. 21. 19:50

 

 

1권

 

제 1장 논의의 기준을 정하는 일

 

가볍고 무거움, 길고 짧은, 착함과 악함, 옳고 그름(軽重長短善悪是非等)등의 글자는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가볍지 않으면 무겁다고 할 수 있다. 착하지 않으면 악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볍다는 것은 무거운 것보다 가볍고, 착하다는 것은 악하다는 것보다 착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도 저것도 서로 비교하지 않으면 가벼움과 무거움, 선함과 악함을 논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서로 비교하여 무거움도 정하고 착함도 정하는 일을 의론의 기준이라고 부른다. 속담에 이르기를, 복부는 등으로 갈음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여, 작은 벌레를 죽여서 큰 벌레를 구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을 논의하는 데, 복부는 등보다도 중요한 것이므로, 차라리 등에 상처를 입혀서 복부를 무난히 지키지 않을 수 없다. 또 동물을 다루는 데, 학은 미꾸라지보다도 크게 귀한 것이므로, 학의 먹이로 미꾸라지를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일이다. 비유컨대 일본에서 봉건시대에 지방 호족(大名)과 신하들(藩士)은 하는 일이 없이 옷을 입고 식사를 했다는 것을, 그 제도를 고쳐 지금과 같이 하는 것은, 헛되이 부유한 무리들을 뒤엎고 가난이라는 고생에 빠뜨리는 것과 유사하므로, 일본국과 여러 호족의 봉토를 비교하면, 일본국이 중요하고, 여러 호족의 봉토는 가벼워, 호족의 봉토를 폐지하는 것은 역시 복부를 등에 대체하지 않는 것과 같고, 지방 호족과 신하들의 봉록을 빼앗은 것은 미꾸라지를 죽여 학을 기르는 것과 같다. 모든 사물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은 가지의 끝을 떨치고 그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멈추는 장소의 기준을 구하는 것이라 아니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으면 논의의 항목은 차츰 줄어서 그 기준은 더욱더 확실해질 수 있다. 뉴턴은 최초로 인력의 원리를 발명하여, 대체로 물체는, 한 번 움직이면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한 번 멈추면, 멈추어서 움직이지 않아서, 뚜렷이 그 규칙을 세우는 데서부터, 세계 만물의 운동 원리는, 모두 이것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규칙이라는 것은 곧 이치의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운동의 원리를 논하는 데 이르러, 그 규칙이 없으면 그 논의가 각양각색이어서 제한하는 일이 없고, 선박은 선박의 운동으로써 원리의 규칙을 세우고, 수레는 수레의 운동으로써 토론의 기준을 정하여, 헛되이 이해 항목만을 늘여서 그 귀결되는 바의 근원이 하나가 되지 않고,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곧 역시 확실해질 수 없다.

논의의 기존을 정하지 않으면 그 이해득실을 말할 수 없다. 성벽은 방어하는 자를 위해서는 이익이 되지만 공격하는 자를 위해서는 해가 된다. 적군의 이득은 아군의 손실이 된다. 옛날의 편리는 미래의 불편이 된다. 따라서 이것들의 이해득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의도하는 바를 정하여, 방어하는 사람을 위해서인지, 공격하는 사람을 위해서인지, 적군을 위해서인지, 아군을 위해서인지, 무엇에서라도 그 주로 하는 바의 근본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과 현재의 여론이 많고 서로 어긋나는 일도, 그 뿌리를 찾으면 원래 소견을 달리하여, 그 끝에 이르러 강력하게 그 가지의 끝을 고르게 하고 싶은 것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신도(神道)와 불교의 교설은, 항상 맞지 않아서, 각각 그 주장하는 바를 들으면 무엇도 지당한 방법이 들려서, 그 뿌리를 찾으면 신도는 현재의 길흉(吉凶)을 말하고, 불교의 법은 미래의 화복(禍福)을 주장하여, 논의의 기준이 다른 것으로써 두 가지 주장 모두는 결국 맞지 않는다. 유교학자와 일본학자 사이에도 논쟁이 있는데 천만 갈래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 아는 바의 큰 취지는, 유교학자는 탕왕과 무왕이 (은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 추방된 것을 긍정하는데, 일본학자는 천황의 한 혈통이 영원함을(一系万代) 주장하는 데 있다. 유교학자가 곤란에 처하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사건뿐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엽적인 것만 말하는 동안은, 신도와 유교와 불교의 다른 이론을 결말짓는 날이 없어서, 그 상황이 마치 무력을 사용하는 데 활과 화살 및 칼과 창의 득실을 다투는 것과 같아서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이것을 화목하게 하고자 원한다면, 그 각각 주장하는 바의 것보다도 한층 더 고상한 새로운 주장을 보이어, 스스로 새로운 것과 옛것의 득실을 판단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따름이다. 활과 화살 및 검과 창의 논쟁도 옛날 한 때는 시끄러운 일이었으나, 소총이 도입된 이래는 세상에서 그것을 말하는 자가 없다. 《신관[神官]의 말을 들으면, 신관[神官]에게도 신도의 장례식 법이 있어서 미래를 말하게 된다고도 말하고, 또 중의 말을 들으면, 법화경[法華經] 등등에도 부처의 가호를 빌고 기도하는 관습도 있어서 불교의 법으로써 현재의 길흉[吉凶]을 중요시하는 일이 있다고도 말하여, 반드시 복잡한 논의를 말하지 말라.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신도와 불교가 섞인 것이 오래 된 때문인데, 승려가 신관[神官]의 행동을 시험하고, 신관[神官]이 승려의 직분을 침범하지 않게 할 따름이어서, 신도와 불교 양 종교의 천년 이래 습관을 보면 분명하다. 오늘날 시끌벅적한 논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

또 논의의 기준을 다르게 한다는 것을 보는 데, 주장의 끝은 서로 같게 하는 것과 비슷해도 중간에서부터 서로 분리되어 그 귀착하는 곳을 다르게 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해(利害)를 설명하는 데, 이것은 이익이고 이것은 해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두 가지 주장이 서로 같다하더라도, 이것을 이익으로 하고 이것을 해악으로 하는 것으로써 이치를 설명하는 데 이르면, 그 주장은, 중간에서부터 서로 달라져서 귀착하는 곳이 같지 않다. 비유컨대 완고한 무사와 백성이 외국인을 해악으로 하는 것으로써 관례였다. 또 학자 무리의 사람들에게서도 조금 식견이 있는 자는 외국인의 행동을 보고 결단코 심취하지 않고, 그것을 흡족해하지 않는 마음은 그 완고한 사람들과 다른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1단계까지는 두 가지 주장이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게 될 수 있어도, 이것을 흡족해하지 않는 이치를 설명하는 데 이르면 처음부터 차질이 생겨, 갑(甲)은 오직 외국인을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인식하여, 사정의 이해득실(利害得失)에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언짢아할 따름이다. 을(乙)은 적은 소견을 원대하게 하여, 오직 그것을 언짢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지 않아도, 그 외교상에서부터 생기게 될 폐해를 신중하게 생각하여, 문명이라고 칭하는 외국인에서도 우리에 대하여 불공평한 조처가 있음을 분노한다. 쌍방이 함께 그것을 언짢아하는 마음이 같다 하더라도, 그것을 언짢아하는 원인을 다르게 하는 것 때문에, 그것에 응하는 방법도 역시 한 가지 방식이 되지 않는다. 곧 이 외국을 배척하는 사람들도 나라를 열자는 사람들도, 주장의 끝은 같아도 중간에서 서로 갈라져서 그 근본을 다르게 하는 바이다. 대체로 인간의 만사(万事) 놀고 즐기고 연회를 베푸는 일에 이르는 데까지도, 사람들이 그 일을 함께하지만 그 취미를 다르게 하는 일이 많다. 일시 그 사람의 거동을 피상적으로 보면 갑자기 그 마음 속 생각(心事)을 판단할 수가 없다.

또 혹은 사물의 이해를 논하는 데, 그 극한점과 극한점을 지니고 나가 논의의 처음부터 갈라져, 쌍방이 서로 근접함이 불가능한 일이 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한다. 지금, 국민 동등권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말하는 자가 있어, 과거의 풍습을 고집하는 사람은 이것을 듣고 금방 민주정치의 이론으로 간주하여, 지금 우리 일본에서도 민주정치의 이론을 주장하여 우리의 국체(国体)를 어떻게 할까를 말하여, 마침내 예기치 않은 불행이 있다고 말하여, 그 심려하는 모양이 흡사 임금도 없고 정부도 없는 큰 혼란에 빠져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아서, 논의의 미래의 미래를 예상해서, 아직 동등한 권리가 어떤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여, 그 취지가 놓인 곳을 묻지 않고, 한 결같이 이것을 거부할 따름이다. 또 저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과거의 풍습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적과 같이 생각하여, 무리를 범하여 옛날의 주장을 배척하여, 마침내 적대의 세력을 이루니 논의가 서로 맞는 일이 없다. 결국 쌍방으로부터 극한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오기 시작하므로 불편함이 생긴다. 가까이 이것을 비유해서 말한다. 여기에 술꾼과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 두 사람이 있어, 술꾼은 떡을 싫어하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술을 싫어하여, 다 같이 그 해로움을 말하고 그 폐지를 주장한다. 그러나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 술꾼의 주장을 거슬러 말하여, 떡을 유해한 것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수백 년 이래의 관례를 폐지하고 정월 초하루에 차로 끓인 밥을 먹고, 떡집의 가업을 중단시켜 국가 안에서 찹쌀을 경작하는 일을 금지시킬 수 있는지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술꾼은 또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반박하여 말하여, 술을 해로운 것이라면 내일부터 천하의 술집을 부수어, 만취한 자는 엄벌에 처하고, 약품의 알코올 성분에서는 감주(甘酒: 단술)로 대용하도록 하고, 결혼식에서는 물 잔으로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이 다른 주장의 양극이 서로 마주칠 때는 그 힘이 반드시 서로 충돌하여 서로 접근하기가 불가능하여, 결국 인간의 불화를 만들어 세상의 커다란 해로움을 이루는 일이 있다. 천하의 옛날에서 지금까지에 그 사례가 적지 않다. 이 불화하는 것은 학자와 군자 사이에서 발생할 때는, 혀와 붓을 이용하여 싸워서 혹은 주장을 말하고 혹은 책을 저술하여, 이른바 헛된 이론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있다. 오로지 배운 것이 없어서 글자를 모르는 자가 혀와 붓을 놀리는 일에 능하지 못하여 근육과 뼈의 힘에 의지하여, 자칫하면 암살 따위를 계획하는 일이 많다.

또 세상의 논의가 서로 싸우는 일을 보니, 서로 한 편의 빈틈을 공격하여 쌍방의 진면목을 널리 알릴 수 없는 경우이다. 그 빈틈이라는 것은 사물의 한 가지 이익과 한 가지 이득에 따르는 바의 폐해를 말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시골의 농민은 정직하지만 고집스럽고 어리석으며, 도시의 시민은 영리하지만 경박하다. 정직과 영리도 사람의 미덕이지만, 고집과 어리석음과 경박함은 항상 그것에 동반하는 폐해이다. 시골사람의 논의도 도시민의 논의도그 논쟁의 발단이 이곳에 있는 일이 많다. 시골사람은 도시민을 보고 경박한 아이라고 칭하고, 도시민은 시골사람을 욕하여 완고하고 비천한 자라고 말하여 그 사정이 흡사 쌍방이 각각 눈 하나를 뜨고 다른 편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그 추함만을 보는 일과 같다. 만약 이 패거리들로 하여금 두 개의 눈을 모두 뜨게 하여 한 개의 눈으로는 다른 편의 장점을 살피고 나머지 한 개의 눈으로는 그 단점을 덮게 하면 그 논쟁이 그칠 뿐만 아니라 결국 서로 친구로 보아 상호간에 이익을 보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세상의 학자들도 역시 이와 같다. 비유컨대 현재 일본에서 논쟁자들의 종류를 구분하면 옛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과 개혁가 두 가지의 파가 있을 따름이다. 개혁가는 예민하여 진취성을 취하는 사람이고 옛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은 착실하여 과거를 지키는 사람이다. 과거를 지키는 자는 완고하고 비천함에 빠지는 폐단이 있고 진취성을 취하는 자는 가벼움에 흐르는 질환이 있다. 그렇다할지라도 착실함이 반드시 완고하고 비천함을 동반해야 할 이유가 없고 예민함이 반드시 경박함에 흘러야 할 이유가 없다. 시험 삼아 관찰하면 세간의 사람들은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떡을 먹되 식상하지 않는 자가 있다. 술도 떡도 반드시 주취와 식상의 원인이 아니고, 그런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오직 이것을 절제하는지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구파도 반드시 개혁가를 험담해서는 안 되고 개혁가도 반드시 수구파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네 가지 것이 있으니 첫째는 착실함이요 둘째는 완고하고 비천함이요 셋째는 예민함이요 넷째는 경솔함이다. 첫째와 넷째를 맞추고 둘째와 셋째를 연결하면, 반드시 서로 적대시하여 서로 경멸하지 않을 수 없어도, 첫째와 셋째가 만날 때는 반드시 서로 일치하여 서로 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서로 친한 마음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쌍방의 진면목을 나타내서, 차츰 그 적의(敵意)를 녹일 수 있다. 예전 봉건시대에는 다이묘 집안(大名の家)이 도래하여 에도의 영주의 저택에 거주하는 자도 지방에 있는 자도 그 논의가 항상 어긋나서 같은 번(藩)의 가문 중에도 대부분 원수와 같이 되는 일이 있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진면목의 드러나지 않는 한 가지 사례이다. 이것들의 폐해는 원래 인간의 지식이 발전하는 데 따라 자연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둘째를 제거하는 데 최고로 유력한 일은 인간과 인간의 교제이다. 그 교제는 혹은 사업에서도 혹은 학문에서도, 심지어 예능과 술자리 또는 소송이나 언쟁과 전쟁에서도 오직 인간과 인간이 교제하여 그 마음에서 생각하는 바를 언행으로 표현하는 기회가 되면 크게 쌍방의 인정(人情)을 평화롭게 하고, 이른바 두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다. 의회, 동료의 연설, 도로의 편리함, 출판의 자유 등 모든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하여 지식인들이 주목하도록 하는 이유도 이 국민의 교제를 돕기 위하여 특별히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에 대한 논의는 사람들의 의견을 진술하는 일이지만 원래 한결같지 않다. 의견이 고상하고 원대하면 논의도 역시 고상하고 원대하고, 의견이 천박하다면 논의도 역시 천박하다. 그 천박한 일은, 논의 핵심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일찍이 이미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어서 하는데, 이것 때문에 양쪽 주장의 방향이 달라지는 일이 있다. 비유컨대 지금 외국과의 교류의 이해(利害)를 논의하면서, 갑(甲)은 나라를 열라고 주장하고, 을(乙)도 개국(開國)을 주장하는데 얼핏 이것을 보면 갑과 을의 주장이 들어맞아 비슷해도, 이 갑이라는 사람이 점점 그 주장하는 바를 상술하여 다소 고상하고 원대한 상황에 다다름에 따라, 그 주장은 점점 을의 귀에 거슬려 마침내 쌍방의 불화가 발생하는 일이 있는 것 같음이 이것이다. 아마도 이 을이라는 자는 소위 세간의 평범한 인물이어서 평범한 여론을 주장하여, 그 의견이 다다르는 바가 천박하기 때문에, 이미 논의의 핵심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하고, 언뜻 고상한 말을 듣되 오히려 그 방향을 잃는 일이 있다. 세간에는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마치 위가 약한 사림이 자양 음식을 먹고, 이것을 소화시킬 수 없어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것과 같다. 이 생각을 한 번 보면, 혹은 고상하고 원대한 논의는 세상을 위하여 해롭고 무익한 것과 유사하더라도, 결코 그렇지 않다. 고상하고 원대한 논의가 없으면 후배들로 하여금 고상하고 원대한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길이 없다. 위가 약한 것을 두려워하여 자양을 그만두면 환자는 마침내 죽을 수 있다. 이 마음가짐의 위반으로부터 옛날과 현재의 비극적 일이 생겼다. 어떤 국가에서도 어떤 시대에서도 한 세대의 국민을 보는 데, 지극히 어리석은 자도 큰 지혜를 가진 자도 드물다. 다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지혜와 우둔함의 중간에 있어 세간에 서로 이동하면서 죄(罪)도 아니고 공(功)도 아니게 서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면서 일생을 마친다. 이런 사람들을 세간의 보통사람이라고 한다. 이른바 여론은 이런 무리들 사이에서 생기는 논의인데 틀림없이 당시 세대의 상황을 닮았는데 이전 시대를 회고하여 물러나는 일도 없고, 후세를 향한 선견(先見)도 아니고, 흡사 한곳에서 멈추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현재 세간에는 이런 무리들이 많아서 그 말이 시끄럽기 때문에 이 세상의 논의를 묘사하여, 겨우 이 화선(画線) 위로 나오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것을 이단망설(異端妄說)로 지적하고, 억지로 화선(画線) 안으로 끌어들여 세상의 논의를 일직선과 같게 되도록 하는 자는, 과연 어떤 심보인가? 만약 그와 같이 된다면 저 지식인이 되는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어떤 쓸모가 될 수 있는가? 미래를 미리 보고 문명의 시작을 여는 것에서 과연 어떤 사람에게 의뢰할 수 있는가? 생각이 없는 심각한 일이다. 시험 삼아 관찰하면, 옛날부터 문명의 진보는, 그 시작은 모두 소위 이단망설(異端妄説)에서 시작하지 않은 일이 없다. 아담 스미스가 처음에 경제론을 주장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반박하지 않았던가?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는 이단이라고 칭하여 벌을 받지 않았던가? 기이한 주장과 논쟁의 해(年)가 겹치며,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흡사 지혜로운 사람의 채찍질을 받아 부지불식간에 그 범위에 들어가, 오늘날의 문명에 이르러 학교의 어린이들이라 하더라도 경제론이나 지동설을 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 비단 이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의 법칙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그것을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세간에서 뒤떨어진 세력이 된다. 또한 최근 한 사례를 들어 말하면, 지금부터 약 10여년 전만해도 300명의 제후가 한 정부를 세우고, 영주와 신하 및 위와 아래의 분별을 명확히 하여 죽이고 살리는 일과 주고 빼앗는 권리를 잡고, 그 견고한 일도 그것을 영원히 전할 수 있는 것 같았어도, 순간에 와해되어 지금의 형편으로 변했고, 오늘날이 되어서는 세간에 이것을 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어도, 만약 10년 전에 여러 무사 가운데 번(藩)을 폐지하고 현(県)등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 번(藩) 가운데서 이것을 무엇이라고 했을까? 즉각 그 몸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논하는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옛날의 이단망설(異端妄説)은 현세의 통론(通論)이 되고, 어제의 기이한 주장은 오늘의 일상적인 말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이단망설(異端妄説)도 역시 반드시 미래의 통설 및 일상적인 말이 될 수 있다. 학자는 합당하게 세론의 시끄러움을 꺼려하지 말고, 이단망설((異端妄説)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이, 용기를 내어 내가 생각하는 바의 주장을 털어놓을 수 있다. 혹은 또 타인의 주장을 듣고 나의 의견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충분히 그 의미가 있는 곳을 살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용납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잠정적으로 그 지향하는 바에 맡겨두고, 다른 날 쌍방이 귀착하는 바가 일치하는 시간을 기다릴 수 있다. 즉 그런 논의의 기준을 일치시키는 날이다. 반드시 타인의 주장을 나의 범위 안에서 농락하여 세상의 논의를 획일화 하려고 하지 말라.

이와 같은 유래로써 사물의 이해득실을 논하니, 우선 그 이해득실의의 관련된 장소를 살피고 그 가볍고 무거움과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해득실을 논하는 것은 쉬워도, 가볍고 무거움과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한 몸의 이해로써 세상의 일을 판단할 수 없고, 일 년의 편리함과 불편함을 논하며 백년의 계략을 그르칠 수 없다. 많은 고금의 주장하는 바를 듣고, 널리 세계의 사정을 알고, 마음을 비우고 태연함으로써 최선이 머무는 곳을 밝히고, 수많은 장애물을 거스르고 여론에 속박되는 일이 없고, 고상한 지위를 점하여 전 시대를 회고하고, 혜안을 열어 후세를 미리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논의의 기준을 정하여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을 명확히 하고, 온 세상의 사람을 모두 나의 소견과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은, 물론 우리들이 계획하는 바가 아니더라고, 감히 한 마디를 내세워 세상의 사람들에게 묻는다. 현재의 시대를 맞아서, 앞으로 나갈 것인가, 뒤로 후퇴할 것인가, 전진하여 문명을 따를 것인가, 후퇴하여 야만으로 돌아갈 것인가, 오직 진퇴의 두 글자만 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실제로 시행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의 취지가 아니어서 사람마다의 궁리에 맡긴다.

 

 

 

 

 

巻之一

 

第一章 議論の本位を定る事

 

 軽重長短善悪是非等の字は相対したる考より生じたるものなり。軽あらざれば重ある可らず。善あらざれば悪ある可らず。故に軽とは重よりも軽し、善とは悪よりも善しと云ふことにて、此と彼と相対せざれば軽重善悪を論ず可らず。斯の如く相対して重と定り善と定りたるものを議論の本位と名く。諺に云く、腹は脊に替へ難し。又云く、小の虫を殺して大の虫を助くと。故に人身の議論をするに、腹の部は脊の部よりも大切なるものゆゑ、寧ろ脊に疵を被るも腹をば無難に守らざる可らず。又動物を取扱ふに、鶴は鰌(どぜう)よりも大にして貴きものゆゑ、鶴の餌には鰌を用るも妨なしと云ふことなり。譬へば日本にて封建の時代に大名藩士無為にして衣食せしものを、其制度を改めて今の如く為したるは、徒に有産の輩を覆(くつがへ)して無産の難渋に陥れたるに似たれども、日本国と諸藩とを対すれば、日本国は重し、諸藩は軽し、藩を廃するは猶腹の脊に替へられざるが如く、大名藩士の禄を奪ふは鰌を殺して鶴を養ふが如し。都て事物を詮索するには枝末を払て其本源に遡り、止る所の本位を求めざる可らず。斯くの如くすれば議論の箇条は次第に減じて其本位は益確実なる可し。「ニウトン」初て引力の理を発明し、凡そ物、一度び動けば動て止まらず、一度び止まれば、止まりて動かずと、明に其定則を立てゝより、世界万物運動の理、皆これに由らざるはなし。定則とは即ち道理の本位と云ふも可なり。若し運動の理を論ずるに当て、この定則なかりせば其議論区々にして際限あることなく、船は船の運動を以て理の定則を立て、車は車の運動を以て論の本位を定め、徒に理解の箇条のみを増して其帰する所の本は一なるを得ず、一ならざれば則ち亦確実なるを得ざる可し。

 議論の本位を定めざれば其利害得失を談ず可らず。城郭は守る者のために利なれども攻る者のためには害なり。敵の得は味方の失なり。往者の便利は来者の不便なり。故に是等の利害得失を談ずるためには、先づ其ためにする所を定め、守る者のため歟、攻る者のため歟、敵のため歟、味方のため歟、何れにても其主とする所の本を定めざる可らず。古今の世論多端にして互に相齟齬するものも、其本を尋れば初に所見を異にして、其末に至り強ひて其枝末を均ふせんと欲するに由て然るものなり。譬へば神仏の説、常に合はず、各其主張する所を聞けば何れも尤の様に聞ゆれども、其本を尋れば神道は現在の吉凶を云ひ、仏法は未来の禍福を説き、議論の本位を異にするを以て両説遂に合はざるなり。漢儒者と和学者との間にも争論ありて千緒万端なりと雖ども、結局其分るゝ所の大趣意は、漢儒者は湯武(殷の湯王と周の武王)の放伐(追放)を是とし、和学者は一系万代を主張するに在り。漢儒者の困却するは唯この一事のみ。斯の如く事物の本に還らずして末のみを談ずるの間は、神儒仏の異論も落着するの日なくして、其趣は恰も武用に弓矢剣槍の得失を争ふが如く際限ある可らず。若し之を和睦せしめんと欲せば、其各主張する所のものよりも一層高尚なる新説を示して、自から新旧の得失を判断せしむるの一法あるのみ。弓矢剣槍の争論も嘗て一時は喧しきことなりしが、小銃の行はれてより以来は世上に之を談ずる者なし。《神官の話を聞かば、神官にも神葬祭の法あるゆゑ未来を説くなりと云ひ、又僧侶の説を聞かば、法華宗などには加持祈祷の仕来もあるゆゑ仏法に於ても現在の吉凶を重んずるものなりと云ひ、必ず込入たる議論を述るならん。されども是等は皆神仏混合の久しきに由り、僧侶が神官の真似を試み、神官が僧侶の職分を犯さんとせしのみにて、神仏両教の千年来の習慣を見て明なり。今日又喋々の議論を聞くに足らず。》

 又議論の本位を異にする者を見るに、説の末は相同じきに似たれども中途より互に枝別して其帰する所を異にすることあり。故に事物の利害を説くに、其これを利としこれを害とする所を見れば両説相同じと雖ども、これを利としこれを害とする所以の理を述るに至れば、其説、中途より相分れて帰する所同じからず。譬へば頑固なる士民は外国人を悪むを以て常とせり。又学者流の人にても少しく見識ある者は外人の挙動を見て決して心酔するに非ず、之を悦ばざるの心は彼の頑民に異なることなしと云ふも可なり。此一段までは両説相投ずるが如くなれども、其これを悦ばざるの理を述るに至て始て齟齬を生じ、甲は唯外国の人を異類のものと認め、事柄の利害得失に拘はらずして只管これを悪むのみ。 乙は少しく所見を遠大にして、唯これを悪み嫌ふには非ざれども、其交際上より生ずべき弊害を思慮し、文明と称する外人にても我に対して不公平なる処置あるを忿るなり。双方共に之を悪むの心は同じと雖ども、之を悪むの源因を異にするが故に、之に接するの法も亦一様なるを得ず。即是れ攘夷家と開国家と、説の末を同ふすれども中途より相分れて其本を異にする所なり。都て人間万事遊嬉宴楽のことに至るまでも、人々其事を共にして其好尚を別にするもの多し。一時其人の挙動を皮相して遽に其心事を判断する可らざるなり。

 又或は事物の利害を論ずるに、其極度と極度とを持出して議論の始より相分れ、双方互に近づく可らざることあり。其一例を挙て云はん。今、人民同権の新説を述る者あれば、古風家の人はこれを聞て忽ち合衆政治の論と視做し、今我日本にて合衆政治の論を主張せば我国体を如何せんと云ひ、遂には不測の禍あらんと云ひ、其心配の模様は恰も今に無君無政の大乱に陥らんとてこれを恐怖するものゝ如く、議論の始より未来の未来を想像して、未だ同権の何物たるを糺さず、其趣旨の在る所を問はず、只管これを拒むのみ。又彼の新説家も始より古風家を敵の如く思ひ、無理を犯して旧説を排せんとし、遂に敵対の勢を為して議論の相合ふことなし。畢竟双方より極度と極度とを持出だすゆゑ此不都合を生ずるなり。手近くこれを譬へて云はん。爰に酒客と下戸と二人ありて、酒客は餅を嫌ひ下戸は酒を嫌ひ、等しく其害を述て其用を止めんと云ふことあらん。然るに下戸は酒客の説を排して云く、餅を有害のものと云はゞ我国数百年来の習例を廃して正月の元旦に茶漬を喰ひ、餅屋の家業を止めて国中に餅米を作ることを禁ず可きや、行はる可らざるなりと。酒客は又下戸を駁して云く、酒を有害のものとせば明日より天下の酒屋を毀ち、酩酊する者は厳刑に処し、薬品の酒精には甘酒を代用と為し、婚礼の儀式には水盃を為す可きや、行はる可らざるなりと。斯の如く異説の両極相接するときは其勢必ず相衝(つき)て相近づく可らず、遂に人間の不和を生じて世の大害を為すことあり。天下古今に其例少なからず。此不和なるもの学者君子の間に行はるゝときは、舌と筆とを以て戦ひ、或は説を吐き或は書を著し、所謂空論を以て人心を動かすことあり。唯無学文盲なる者は舌と筆とを用ること能はずして筋骨の力に依頼し、動もすれば暗殺等を企ること多し。

 又世の議論を相駁するものを見るに、互に一方の釁(きん)を撃て双方の真面目を顕し得ざることあり。其釁とは事物の一利一得に伴ふ所の弊害を云ふなり。譬へば田舎の百姓は正直なれども頑愚なり、都会の市民は怜悧なれども軽薄なり。正直と怜悧とは人の美徳なれども、頑愚と軽薄とは常に之に伴ふ可き弊害なり。百姓と市民との議論を聞くに、其争端この処に在るもの多し。百姓は市民を目して軽薄児と称し、市民は百姓を罵(ののしり)て頑陋物と云ひ、其状情恰も双方の匹敵各片眼を閉じ、他の美を見ずして其醜のみを窺ふものゝ如し。若し此輩をして其両眼を開かしめ、片眼以て他の所長を察し片眼以て其所短を掩ひ、其争論止むのみならず、遂には相友視して互に益を得ることもある可し。世の学者も亦斯の如し。譬へば方今日本にて議論家の種類を分てば古風家と改革家と二流あるのみ。改革家は穎敏にして進て取るものなり、古風家は実着にして退て守るものなり。退て守る者は頑陋に陥るの弊あり、進て取る者は軽率に流るゝの患あり。然りと雖ども、実着は必ずしも頑陋に伴はざる可らざるの理なし、穎敏は必ずしも軽薄に流れざる可らざるの理なし。試に見よ、世間の人、酒を飲て酔はざる者あり、餅を喰ふて食傷せざる者あり。酒と餅とは必ずしも酩酊と食傷との原因に非ず、其然ると然らざるとは唯これを節する如何に在るのみ。然ば則ち古風家も必ず改革家を悪む可らず、改革家も必ず古風家を侮る可らず。爰に四の物あり、甲は実着、乙は頑陋、丙は穎敏、丁は軽率なり。甲と丁と当り乙と丙と接すれば、必ず相敵して互に軽侮せざるを得ずと雖ども、甲と丙と逢ふときは必ず相投じて相親まざるを得ず。既に相親むの情を発すれば初て双方の真面目を顕はし、次第に其敵意を鎔解するを得べし。昔封建の時に大名の家来、江戸の藩邸に住居する者と国邑(こくいふ)に在る者と、其議論常に齟齬して同藩の家中殆ど讐敵の如くなりしことあり。是亦人の真面目を顕はさゞりし一例なり。是等の弊害は固より人の智見の進むに従て自から除く可きものとは雖ども、之を除くに最も有力なるものは人と人との交際なり。其交際は、或は商売にても又は学問にても、甚しきは遊芸酒宴或は公事訴訟喧嘩戦争にても、唯人と人と相接して其心に思ふ所を言行に発露するの機会となる者あれば、大に双方の人情を和はらげ、所謂両眼を開て他の所長を見るを得べし。人民の会議、社友の演説、道路の便利、出版の自由等、都て此類の事に就て識者の眼を着する由縁も、この人民の交際を助るがために殊に之を重んじるものなり。

 都て事物の議論は人々の意見を述べたるものなれば固より一様なる可らず。意見高遠なれば議論も亦高遠なり、意見近浅なれば議論も亦近浅なり。其近浅なるものは、未だ議論の本位に達すること能はずして早く既に他の説を駁せんと欲し、これがため両説の方向を異にすることあり。譬へば今外国交際の利害を論ずるに、甲も開国の説なり、乙も開国の説にて、遽にこれを見れば甲乙の説符合するに似たれども、其甲なる者漸く其論説を詳にして頗る高遠の場合に至るに従ひ、其説漸く乙の耳に逆ふて遂に双方の不和を生ずることあるが如き、是なり。蓋し此乙なる者は所謂世間通常の人物にして通常の世論を唱へ、其意見の及ぶ所近浅なるが故に、未だ議論の本位を明にすること能はず、遽に高尚なる言を聞て却て其方向を失ふものなり。世間に其例少なからず。猶かの胃弱家が滋養物を喰ひ、これを消化すること能はずして却て病を増すが如し。この趣を一見すれば、或は高遠なる議論は世のために有害無益なるに似たれども、決して然らず。高遠の議論あらざれば後進の輩をして高遠の域に至らしむ可き路なし。胃弱を恐れて滋養を廃しなば患者は遂に斃(たふ)る可きなり。此心得違よりして古今世界に悲む可き一事を生ぜり。何れの国にても何れの時代にても、一世の人民を視るに、至愚なる者も甚だ少なく至智なる者も甚だ稀なり。唯世に多き者は、智愚の中間に居て世間と相移り罪もなく功もなく互に相雷同して一生を終る者なり。此輩を世間通常の人物と云ふ。所謂世論は此輩の間に生ずる議論にて、正に当世の有様を摸出(もしゆつ)し、前代を顧て退くこともなく、後世に向て先見もなく、恰も一処に止て動かざるが如きものなり。然るに今世間に此輩の多くして其衆口の喧しきがためにとて、其所見を以て天下の議論を画し、僅にこの画線の上に出るものあれば則ちこれを異端妄説と称し、強ひて画線の内に引入れて天下の議論を一直線の如くならしめんとする者あるは、果して何の心ぞや。若し斯くの如くならしめなば、かの智者なるものは国のために何等の用を為す可きや。後来を先見して文明の端を開かんとするには果して何人に依頼す可きや。思はざるの甚しきものなり。試に見よ、古来文明の進歩、其初は皆所謂異端妄説に起らざるものなし。「アダム・スミス」が始て経済の論を説きしときは世人皆これを妄説として駁したるに非ずや。「ガリレヲ」が地動の論を唱へしときは異端と称して罪せられたるに非ずや。異説争論年又年を重ね、世間通常の群民は恰も智者の鞭撻を受て知らず識らず其範囲に入り、今日の文明に至ては学校の童子と雖ども経済地動の論を怪む者なし。啻にこれを怪まざるのみならず、此議論の定則を疑ふものあれば却てこれを愚人として世間に歯(よは)ひせしめざるの勢に及べり。又近く一例を挙て云へば、今を去ること僅に十年、三百の諸侯各一政府を設け、君臣上下の分を明にして殺生与奪の権を執り、其堅固なることこれを万歳に伝ふ可きが如くなりしもの、瞬間に瓦解して今の有様に変じ、今日と為りては世間にこれを怪む者なしと雖ども、若し十年前に当て諸藩士の内に廃藩置県等の説を唱る者あらば、其藩中にてこれを何とか云はん。立どころに其身を危ふすること論を俟たざるなり。故に昔年の異端妄説は今世の通論なり、昨日の奇説は今日の常談なり。然ば則ち今日の異端妄説も亦必ず後年の通説常談なる可し。学者宜しく世論の喧しきを憚らず、異端妄説の譏(そしり)を恐るゝことなく、勇を振て我思ふ所の説を吐く可し。或は又他人の説を聞て我持論に適せざることあるも、よく其意の在る所を察して、容る可きものは之を容れ、容る可らざるものは暫く其向ふ所に任して、他日双方帰する所を一にするの時を待つ可し。即是れ議論の本位を同ふするの日なり。必ずしも他人の説を我範囲の内に籠絡して天下の議論を画一ならしめんと欲する勿れ。

 右の次第を以て事物の利害得失を論ずるには、先づ其利害得失の関る所を察して其軽重是非を明にせざる可らず。利害得失を論ずるは易しと雖ども、軽重是非を明にするは甚だ難し。一身の利害を以て天下の事を是非す可らず、一年の便不便を論じて百歳の謀を誤る可らず。多く古今の論説を聞き、博く世界の事情を知り、虚心平気以て至善の止まる所を明にし、千百の妨碍を犯して世論に束縛せらるゝことなく、高尚の地位を占めて前代を顧み、活眼を開て後世を先見せざる可らず。蓋し議論の本位を定めて之に達するの方法を明にし、満天下の人をして悉皆我所見に同じからしめんとするは、固より余輩の企る所に非ずと雖ども、敢て一言を掲て天下の人に問はん。今の時に当て、前に進まん歟、後に退かん歟、進て文明を逐はん歟、退て野蛮に返らん歟、唯進退の二字あるのみ。世人若し進まんと欲するの意あらば余輩の議論も亦見る可きものあらん。其これを実際に施すの方法を説くは此書の趣旨に非ざれば之を人々の工夫に任するな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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